8년 전, 회사를 그만두고 해외에서 살아보겠다고 무작정 엄마에게 통보했던 날이 생각난다. 하나밖에 없는 딸이 해외로 간다니 엄마는 걱정이 되셨는지 그 후로 온갖 잔소리를 하셨는데 그런 걱정 어린 잔소리들이 마음으로는 이해가 되면서도, 내심 불편하게 느껴졌다.
"엄마, 나는 무엇이든 잘할 거야. 그런데 나를 가장 응원해 주었으면 좋겠는 사람이 계속 걱정을 하니 내 마음이 너무 불안해. 나를 믿어 주었으면 좋겠어."
아무 생각 없이 속마음을 엄마에게 털어놓았는데, 그 후 엄마는 내 앞에서 단 한 번도 부정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그게 나에겐 엄청난 용기와 힘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에서야 생각해 보면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나 싶다. 내 마음 편해지자고 엄마의 마음을 되짚어 보지 못했다. 내 한마디에 본인의 감정을 속으로 삭이셨을 엄마를 생각하면 정말 미안한 마음뿐이다. 본인은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얼마나 불안하셨을까.
얼마 전에 엄마가 된 사촌 언니가 나한테 말했다.
"나는 처음엔 네가 대단한 줄 알았거든? 그런데 내가 엄마가 되어 보니 너보다 외숙모가 대단한 거였더라"
이런 우리 엄마가 퇴직을 앞두고 계신다. 아마 엄마는 퇴직할 때 즈음엔, 자식 결혼도 시키고 손자손주도 보고 딸이 어느 정도 자리도 잡고 해서 엄마도 엄마의 인생을 누리며 노년을 편안하고 즐겁게 살겠지?라고 생각하시지 않으셨을까?
하지만 현실은 이 철없는 딸 새끼가 발리에 살겠노라고 서른 후반을 바라보는 나이에 대학생이 되질 안나, 전염병이 창궐한 무서운 시기에 한국에 돌아올 생각도 없이 발리에 집을 짓겠다고 있지를 안나, 아주 제멋대로에 망나니 같은 나를 보시며 얼마나 속이 터지셨을까 싶다. 내가 생각해도 아직 결혼도 안 하고 애도 없지만 나 같은 딸이 나올까 두렵다.
하지만 세상 쿨한 우리 엄마는 내가 마음에도 없는 소리로 "그냥 한국 들어갈까? “ 하면
"그냥 거기 있어. 여기 할거 없어."라고 하셨고,
얼토당토않게 "발리에 집을 지어야겠어"라고 했을 때도 "그래, 한번 알아봐"라고 말씀하시는 대인배셨다.
그러기도 그럴 것이 뽀얀 피부에 작은 체구, 누가 보면 손에 물 한번 안 묻혀보고 사셨을 것 같은 소녀 같은 모습 뒤에는 어린 나를 지금까지 혼자의 힘으로 키워낸 대장군의 모습이 있었다.
사실 이 집은 엄마의 도움이 없었다면 시작부터 못 했을 집이었다. 집을 짓기로 마음을 먹고 돈을 마련해야 했는데 팬데믹으로 인해 있던 돈도 다 까먹고 있었던 터라 도저히 나 혼자의 힘 만으로는 전체 자금을 마련할 수 없었다. 게다가 때가 때인 만큼 한국에 들어가 대출을 받을 수도 없었고 해외에서 지낸 지 5년 이상이 된 내가 한국에서 대출을 받을 수 있는 기준을 충족시키기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 염치없지만 엄마를 꼬셔보기로 했는데,
"엄마, 은퇴하고 나서 나랑 같이 발리에서 지내면 얼마나 좋게요?"
이런 철부지 딸의 꼬임에 엄마는 순순히 넘어가주셨다. 아마 이 돈은 엄마가 10년, 아니 평생을 모으셨을 돈일 거다. 심지어 은퇴를 앞두고 계시니 노후를 위해 모아 두신 걸지도 모르는 그 큰돈을 엄마는 선뜻 빌려주셨고 나는 선뜻 받아버렸다. 덕분에 나는 돈보다도 더 중요한 시간을 벌었다. 내가 이 돈을 모아서 이 집을 짓는다면 도대체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릴까? 내가 이 돈을 대출받아서 지었다면 도대체 몇 년을 갚아야 했을까?
엄마가 벌어 준 시간만큼 나는 이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열심히 해 나가는 것 밖에 없다 생각했다. 이렇게 나는 엄마의 도움으로 누군가는 삶의 속도를 줄였을 팬데믹의 시간을 전속력으로 달리고 또 달렸다. 어떻게 해서든 팬데믹이 끝나기 전까지는 그럴듯하게 정착 기반을 만들고 싶었고 10년 가까이 엄마와 떨어져서 보낸 시간을, 엄마가 은퇴하신다면 발리에서 새롭고 즐거운 경험들로 채워드리고 싶었다.
그렇게 공정률이 60%를 넘어갈 때쯤 발리와 한국의 하늘길이 열렸다. 이제는 더 이상 자가격리를 하지 않아도 발리와 한국을 왔다 갔다 할 수 있다. 소식을 듣고 엄마는 누구보다 빨리 3차 백신까지 접종을 하시고 발리로 날아오셨다. 2년 만에 이루어진 모녀상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