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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를 소장하는 것

내가 좋아하는 작은 것들 42

by 노루

초등학교 4학년 때 엄마가 나를 데리고 동네 아웃렛에 아주 작게 자리한 음반 가게로 데려간 적이 있다. 그전까진 영어 테이프만 돌리던 카세트에 가요 테이프를 사주겠다는 엄청난 소식이었다. 한번 골라 봐. 나는 최고의 선택을 하기 위해 몇 번이나 집었다 놨다 하며 고민하다가 결국 한 밴드의 테이프를 골랐었다. 가볍고 연약한 플라스틱 소재의 케이스 안에는 작은 카세트테이프와 7단 정도로 접힌 종이가 들어있었다. 그 종이에는 각 노래별 가사와 앨범 제작자의 정보, 가수의 땡스투가 깨알만 한 글씨로 적혀있었다. 나는 테이프를 밤이고 낮이고 들으며 가사지를 몇 번이나 베껴 썼다.


대 MP3의 시대에는 나도 노래를 다운로드하여 들었다. 오빠가 사용하는 불법 공유사이트를 같이 쓰느라 신청곡을 오빠한테 넘겨줘야 했다. 나는 그때 친구들에 비해 다소 조숙하고 비주류인 음악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 주말 인기가요에서는 절대 들을 수 없는 그 음악들은 대표적으로 홍대 인디밴드나 안테나, 미스틱 같은 느낌의 곡들이었다. 그들의 어딘가 지질한 구석이 있는, 인간적이고 사소한 순간들을 잘도 잡아내는 소박하고 담담한 음악들을 너무 좋아했다. 좋아하는 가수가 라디오나 공연장에서 부른 커버곡들을 녹음해서 파일로 만들어 듣기도 했다.


스마트폰을 쓰기 시작한 대학생 때에도 나는 스트리밍에 쉽게 익숙해지지 못했다. 항상 월 50곡을 선결제하고 그달에 만나는 좋은 노래와, 혹시 같은 앨범에 숨어있을지 모를 명곡들을 두 번 세 번 검색해 다운받았다. 한 곡에 500원이었던가 700원이었던가. 나는 그게 아깝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렇게 이어폰을 귀에 꽂고 그때그때 엮어둔 플레이리스트를 날씨에 맞게 들었다. 곡은 항상 랜덤재생 또는 한곡반복재생이었다. 그러다 보면 신기하게도 잊었던 시간들이 눈앞에 코끝에 성큼 다가오는 순간들이 있었다. 한때 정말 좋아했던 노래를 오랜만에 다시 들었을 때. 전주가 들리면, 그 지나온 한때의 냄새부터 떠올랐다.


좋아하는 노래가 많아진 앨범은 CD로 모았다. 플레이어에 CD를 넣고 재생하면 1번부터 14번 16번가량의 마지막 곡까지 듣고 나면 그건 하나의 드라마고 세상이었다. 곡이 나오기 전, 플레이어가 돌아가는 소리를 좋아했다. 나중엔 자꾸 CD투입구를 잘 닫아도 열렸다고 인식해서 10원짜리 동전을 붙여 고정시켰다. 그 낡은 개구리모양 플레이어가 고장 났다. 몇 번의 이사를 거치며 CD는 그 수가 확연히 줄었고 재생할 플레이어조차 없어져버렸다. 어떤 CD는 겉비닐도 뜯기지 않았다. 나는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지 않게 되었고, 알고리즘은 내가 이 서비스를 이용하기 전의 취향은 반영하지 못했다. 기가 막힌 곡들을 추천해 주어도 이전의 노래는 자꾸 잊었다. 꼭 내 머리처럼 자꾸 맥없이 잊었다.


스트리밍을 하고부터는 그 재미가 없다. 내가 원래 좋아했던 노래들을 뒤적여서 다시 듣는 재미. 원래는 없고 지금만 있어서 속상하다. 한번 잊어버리면 존재했는지도 모르게 되는 게 슬프다. 좋아했던 노래를 소장한다는 건 어렸을 때 썼던 내 방이 남아있는 것과 같은 기분일까. 마음이 헛헛할 때면 우리 집 냄새가 포근하게 밴 내 방에서 이것저것 넘겨보고 열어볼 수 있는 것.


요즘 싱어게인을 보면서 스트리밍 없던 시절 같은 기분으로 산다. 나는 한참 슈퍼키드와 타카피의 노래를 다시 듣고 있다. 나이 들어 다시 듣는 아저씨들의 목소리는 어딘가 여전히 유쾌하고 더 먹먹하다. 얼굴도 몰랐던 사람들, 목소리만 알았던 사람들의 모습을 오랜만에 본다는 기분이 이상했다. 나는 또 10년 전의 냄새를 한껏 들이마시며 괜히 잊었던 노래들을 다시 기웃거려 본다. 왜 괜히 눈물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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