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작은 것들 43
가을은 나에게 은행나무의 계절이다. 집 근처에 커다란 은행나무를 보러 나들이를 나갔다가 차가 너무 막혀 입구에도 닿기 전에 되돌아오고, 대신 동네의 작은 은행나무를 만끽하는 것으로 가을 기분을 내며 쓴다.
해마다 은행나무는 내가 가을이 왔음을 채 알아채기 전에 먼저 노란빛으로 성큼 물들어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걸 보고는 그제야 가을이구나, 했다. 은행나무가 잎을 떨어뜨리는 모습은 꼭 벚꽃잎이 떨어져 내리는 모습과 비슷하다. 바람 살랑에 우수수 떨어진다. 샛노란 것들이 그렇게 바닥으로 곤두박질친다. 바닥엔 노란 발자국처럼 빽빽한 은행잎이 지천이다.
유명한 어떤 은행나무들은 600년, 500년, 나는 가늠할 수 없는 세월을 목에 걸고 높게 크게 집채만큼 자란다. 그 몇 백 해를 보내며 빠짐없이 봄엔 여린 잎을 틔우고 가을엔 물든 잎을 떨어뜨렸을 것이다. 몇백 번의 가을마다 그렇게 내 것이 되었다 싶은 것을 모조리 놓아주고 손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빈 나를 발견했을 것이다. 내가 놓아버린 것들이 발아래 소복이 놓인 모습을 600번, 500번 보았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고 보면 내가 생각하는 복작복작한 것들이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나는 요즘 아깝고 서운하고 암담하고 막막한 일들이 많아서 아무리 누가 그때가 좋아, 해도 들리지 않는다. 꼭 세상을 잘못 살아가고 있는 것 같은, 내 선택은 왠지 실패의 연속인 것만 같은 날들을 보내고 있다. 그럴 때 만나는 그런 무상하고 굳건한 것들은 차라리 괜찮아, 하고 말해주는 어떤 사람보다도 더 의지가 된다. 그게 600년이라면 정말 설득력이 생기는 것이다. 그걸 딛고 그만큼이나 살아온 것들이 있어서 나의 살아감에도 힘을 얻는다. 가을은 다 떠나보내는 계절 같지만 또 그런 것들을 손에서 놓고도 일어서게 되는 계절이다. 600년, 500년 된 은행나무 덕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