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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업

3일 차: 매일 글쓰기 도전

by hohoi파파

"젊었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한다."

돌이켜 보니 월 30만 원을 받고도 즐겁게 일할 수 있었던 이유라고 생각한다.


첫 직장이었던 곳은 낙후된 동네에 있던 지역아동센터였다. 매곡교 다리를 건너면 시장이 있었고 골목마다 빨간색 흰색 천이 걸린 무당집이 많은 곳이었다. 센터 아래층도 그러했다. 문을 연지 3개월밖에 되지 않은 신규 센터라 보조금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일정 기간 자부담이나 후원금으로 운영해야 했고 지자체의 진입 평가를 통과해야만 비로소 보조금이 나왔다. 그 기간이 얼마나 길어질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야말로 아동 모집부터 후원자 개발까지 멘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골목골목을 다녔다.


문제는 운영비조차 감당하기 힘든 상황에서도 운영 조건을 갖추려면 생활복지사를 채용해야 했다. 열악한 근무 환경과 처우 탓에 1년 사이에 세 명의 생활복지사가 이직했다. 아무리 센터장이라고 해도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근무자가 바뀔 때마다 마음만 무겁고 미안했다. 그럼에도 나와 같은 마음일리 없다는 것을 알았다. "젊었을 때 고생하는 거죠"라는 말이 위로가 될 수 없었다. 항상 그만두는 마지막 날에는 그동안 쌓아뒀던 울불을 쏟아냈고 끝까지 함께 하지 못한다는 아쉬움을 남기고 떠났다.


결국 보조금을 받기 전까지 나 혼자만 남았다. 마치 한이 맺혀 떠나지 못하는 지박령처럼 홀로 머물렀다. 하고 싶었고 일 자체가 좋아서이기도 했지만 오후 2~3시가 되면 우당탕탕 2층으로 뛰어올라오는 아이들의 발걸음 소리 때문에 그만두지 못했다. 그만둘 것인가 버틸 것인가 그때 처음으로 고민을 거듭했다.


젊어서 잃을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에는 신앙심도 충만. "잘 될 거다"라는 믿음이 있었다. 무엇보다 하고 있는 일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부족한 운영비를 삼성재단, 공동모금회, 어린이재단 같은 외부 지원 사업 공모로 충당했다. 한 번은 5천만 원 규모의 프로그램비에 1차로 선정되어 서울까지 올라가 최종 면접까지 봤지만 결국 지원받지 못한 적도 있었다. 아쉬움이 컸지만 그 경험조차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때 본업에서 진정한 기쁨을 맛보려면 외부 환경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시절의 하루하루가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아무리 열악해도 내가 하고 싶은 일, 내가 집중할 수 있는 일에 마음을 쏟는 것이야말로 꿈을 지키고 키우는 일이라는 것을. 꿈은 어느 날 갑자기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고생 속에서 조금씩 다듬어지고 단련되는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구닥다리소리라고 듣게 될지 모르겠지만 지금도 “젊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은 꿈을 키우는 과정에 필요한 밑거름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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