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살도 사춘기가 오나요?
네 살 아들의 마음 일기 [혼자 있고 싶다]
네이버 이미지쾅!
쾅!
쾅!
방문을 쾅! 닫으며 들어가는 아들. 문 닫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린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머리가 복잡해졌다.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보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분명한 것은 방으로 들어가는 아들 뒷모습에 여러 가지 감정이 한 뭉탱이다. 네 살이 맞는지. 고스란히 감정을 드러내는 아들 모습에 적잖게 당황했다. 따져보면 그렇게 잘못한 일도 아니다. 억울하지만 어쩌겠는가. 내가 뭐를 잘못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지만 별다른 답을 얻지 못했다. 그냥 아들이 뭔가 감정이 틀어졌다는 것밖에.
조금은 억울하다. 죄라면 아들과 블록을 가지고 신나게 놀았다는 것 밖에는. 아들과 함께 또봇 V로 빙의되어 열심히 싸운 죄다. 아들 비위 맞춰가며 애썼지만 화만 돋았다. 계속해서 져줘야 했나, 장난 삼아 힘을 주고 아들의 블록을 세게 부딪혔더니 블록 하나가 떨어져 나갔다. 떨어져 나간 블록을 한번 보고 나를 쳐다보는 예사롭지 않은 아들의 눈빛. 그때 멈췄어야 했다. 다시 한번 "얍, 얍, 얍" 요란한 소리와 함께 공격을 감행했다. 다른 한쪽마저 떨어져 나간 블록. 사건 발단은 그렇다.
사춘기의 첫 시기, 네 살
미운 네 살.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고집부리며 생떼 쓰는 아이, 부모 눈치를 살살 살피며 하지 말라는 것만 골라 말썽 피우는 아이, 부모의 말에 반항하는 아이. 아이 키우면서 하루도 전쟁이 아닌 날이 없다. 네 살 무렵 전쟁의 서막이 오른다. 마트에서 사달라고 악을 쓰며 드러눕는 아이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아이의 반응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 아이의 요구를 무조건 들어주는가 하면, 화난 표정으로 아이의 손을 확 끌어당기거나 떼쓰는 아이를 그냥 놔두고 그 자리를 떠나는 부모도 있다. 어르고 달래 거나 윽박지르거나 협박하기를 수차례. 아이가 크면 클수록 이런 힘겨루기는 불가피하다. 아무래도 점점 세지는 강도와 잦아지는 힘겨루기에 부모는 미운 네 살이라며 스스로 위안하는 거인지 모른다.
자의식이 싹 뜨는 시기다. 자기주장이 강해지는 시기다. 네 살 무렵, 자신이 갖고 싶은 것을 얻기 위해 생떼 쓰거나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 고집부리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스러운 일을 인정하기까지가 힘들었다. 어쨌든 하고 싶은 욕구가 강해지는 것에 비해 자신의 생각을 조리 있게 설명하거나 논리적으로 사고하는 힘은 상대적으로 미숙하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다소 충동적이고 감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자기중심적인 사고가 강하기 때문이다. 이때 타인의 생각, 감정, 상황, 맥락과 상관없이 오롯이 나의 말이 옳다. 이제 말하기 시작한 네 살 아이가 떼를 쓰지 않고 자신의 요구를 차근차근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런 아이들은 드물다. 또래에 비해 말까지 늦으면 오죽하겠는가.
심리학 관점에서 네 살 무렵, 자율성과 주도성 획득을 발달의 중요한 과제라고 말한다. 만약 발달 과제를 적절한 시기에 획득하지 못하면 욕구가 좌절되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이는 여러 가지 부정적인 경험, 위기를 겪게 된다고 한다. 자율성과 주도성 사실 그 말이 그 말 같다. 관심을 가지고 관련 자료를 찾지 않으면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를 정도로 헷갈린다. 어쨌든 개념의 핵심은 자신의 욕구와 충동되는 상황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을 때, 하고 싶은 일을 스스로 선택하고 주도할 때 건강한 성장을 한다고 한다. 한마디로 스스로 하는 경험이다.
스스로 감정을 달래려는 시도
점점 스스로 하려는 시도가 많아졌다. 돌이켜보면 볼일을 볼 때 화장실 안에 혼자 있지 않으려고 했다. 꼭 화장실에 같이 들어가거나 화장실 문을 열고 볼일을 봤다. 지금은 다르다. 이제는 화장실 불을 켜고 바지와 팬티를 내리고 문을 열고 변기 뚜껑을 열고 앉아서 볼일을 본다. 이 모든 것을 스스로 한다. 급한 마음에 대신 불을 켜주려고 하거나 바지를 내려주려고 하면 "내가 할 거야!" 화부터 낸다. 아니면 다시 불을 끄고 처음부터 본인 스스로 해야 직성이 풀린다.
불편하고 불쾌한 감정이 들 때 방문을 닫으며 들어가는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혼자 있고 싶은 마음은 스스로 감정을 달래려는 시도다. 특히 남자는 더욱 그렇다. 아들 역시 동굴로 들어가는 것을 자처했다. 물론 너무 긴 시간 동굴에 들어가 나올 생각이 없다면 그건 또 다른 문제겠지만 혼자 있는 시간을 통해 감정을 달래는 경험은 중요하다.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고 감정에 따른 행동을 돌아보는 기회, 차분하게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다.
기다리면 스스로 나오는 아이들
기다리면 스스로 나온다. 순간 올라오는 감정으로 방문을 닫으며 들어가지만 아이 스스로 충분하다고 여기면 직접 열고 나온다.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서 들어가는 아들 뒤통수에 대고 버럭 화낼 이유가 없다. 예의 없다고 다그칠 필요 없다. 예의가 없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상한 것이다. 사실 문을 쾅 닫고 들어가는 행동이 달갑지 않다. 예의 없어 보이는 행동이 나를 무시하는 것 같아 오히려 화가 난다. 하지만 부모라면 행동 자체보다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들여다봐야 한다. 침묵하고 기다리면 빼꼼히 문을 연다.
안아주면 언제 그랬나 싶을 정도로 아무렇지 않다. 사실 속 터지는 대목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 또한 이해하는 수밖에. 훈육은 잠깐 미루고 다독이고 아이의 감정에 잠시 함께 머무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아이가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물어보는 것이 좋다. 충분히 공감했다면 그다음에 훈육을. 훈육도 ~하고 싶어도 ~ 가지고 싶어도 다 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리고 화가 날 때나 짜증 나더라도 또박또박 이야기해야 상대방이 알아듣고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줘야 한다. 수없이 반복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아이의 행동이 변한다.
아들과 다르게 나는 동굴에 자처해서 들어가지만 스스로 나오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아직까지도 자기표현에 서툴다. 돌이켜보면 부모님 말을 거스르고 문 닫고 들어가는 용기 초자 못 냈던 것 같다. 착한 아이콤플렉스였다. 부글부글 끓지만 어떤 이유로 참아야 했고 억눌러야 했다. 결국 감정에 못 이겨 폭발하고는 후회만 했던. 억눌린 감정은 나도 타인도 숨 막히게 했다. 긍정적인 감정만 좋다고 여겼는지 모른다. 부정적인 감정을 다스릴 기회가 없었던 것 같다. 불쾌하고 불편하면 입을 다물었던 어린 시절의 모습이 그림자처럼 남아있다.
어쨌든 아들이 어제와 달리 한 뼘 자랐다. 하루가 다르게 크는 아들을 옆에서 지켜보면 무섭다. 아들을 보면서 초등학생이 되면 어떤 아이일까, 중학생이 되면 또 어떨까. 상상하면서 혼자 웃는다. 사춘기, 첫 번째 관문은 지나가고 있다. 생각보다 밉지 않다. 봐줄 만하다. 아이가 건강하게 커준 덕이겠지만 말이다. 나머지 관문이 궁금하다. 7살이 되면, 초등학교 4학년이 되면, 중학교 2학년이 되면 어떤 아이일까. 어제와 다른 내일의 아들이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