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직장 월급은 30만 원이었다. 나는 2009년을 시작으로 10년 차 사회복지사다. 지역아동센터에서 교육복지사까지, 지난 10년을 돌아보니 어찌 버텼을까, 그동안 참 애썼다고 토닥거려주고 싶다. 내가 어찌해서 사회복지사의 길을 걷게 됐는지 알 수 없으나, 어떤 끌림으로 지금까지 왔고 현재 나를 가장 나답게 해주는 일이 됐다.
나다움은 뚜벅뚜벅 외롭게 걷는 길이다. 사회복지 현장에 남자 동료들이 많았다면 덜 외로웠을 텐데, 사실 비빌 언덕이 없다. 현재 전주 시 60여 명의 교육복지사 중 남자는 단 세 명뿐, 경제적인 이유로 떠났거나 이직을 고민한다. 남자 대학 동기들은 다들 어디로 갔는지, 남자 사회복지사는 사회복지 현장에서 서울 김 서방 찾기만큼 만나기 힘들다. 남자 사회복지사로 10년을 일하고 버텨냈다는 것만으로도 상을 받을 만한 자격이 충분하다.(주변에 남자 사회복지사가 있다면 격려 부탁해요.) 셀프 10주년 파티라도 해야겠다.
첫 직장은 지역아동센터 센터장이었다. 지역아동센터는 사회복지 현장에서도 열악하다고 손을 꼽는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별반 다를 게 없다. 하는 일에 비해 월급이 적을 뿐만 아니라 계약직으로 고용불안에 시달린다. 월급도 보통 사회복지사 평균 월급보다 적다. 내가 일했던 2009년 당시, 지역아동센터 생활복지사 월급이 100만 원 미만이었다. 평균 80만 원으로 88만 원 세대였다.
하지만 나는 80만 원은커녕 무급에 가까운월급을 받았다. 제대로 된 첫 월급을 받기까지 1년이 걸렸다. 개소한 지 1년 미만인 센터는 정부 보조금을 받지 못하고 자비나 후원금으로 운영해야 하는데, 정부 지원을 받더라도 적은 보조금으로 운영비와 인건비를 해결해야 했다. 보통 센터장은 다른 실무자 인건비를 챙기느라 최저 임금보다 적거나 무급으로 일하는 경우가 많았다.
아동 모집부터 후원자 개발까지 맨땅의 헤딩하듯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해야 했다. 비탈길 동네를 다니며 우편함에 센터 소식지를 넣었고, 겨울에 센터 수도가 얼어 아랫집 무속인 집에서 물을 길러 아이들 점심을 먹이고, 열악한 근무 환경 탓에 실무자들의 근무 기간은 점점 줄었다. 험난한 길이지만 내가 가야 하는 길이라고 믿었다. 어쩌면 꿈만 좇던 젊음이 아니었다면 시작도 하지 않았을 길이다.
가장 열악한 곳에서 일해보는 것은 어때?
꿈은 아는 형님의 질문에서 시작됐다. 나는 학교 사회복지사가 되고 싶었다. 졸업을 앞두고 아는 형님에게 진로 고민을 털어놓았다. 아는 형님은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더니 가장 열악한 곳을 경험해 보라고 했다. 지역아동센터를 추천했다. 가장 열악한 곳에 다니는 아이들을 경험을 해 봐야 학교에서 힘든 학생들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그래야 아이들을 더 사랑할 수 있다고 말했다.
나는 가슴 뛰었다. 뜨거움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그 순간부터 지역아동센터에서 일해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때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젊으니까 사서 고생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지금 돌아보면 참 나다운 선택이었다.
선택지가 많지 않으면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 2009년 졸업을 하고 지역아동센터 구인 광고만 봤다. 취직하는 게 어렵지 않아 보였다. 근무 조건이 좋지 않았기에 지역아동센터 구인 광고는 넘쳐 났다. 마음만 먹으면 어디라도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학교 사회복지사 자격증 시험이 먼저라고 생각했다. 자격증 시험에 응시하기 위해서는 학교에서 실습을 해야 했고, 그 덕에 보통 한 번 하는 사회복지 실습을 두 번 했다. 친구들은 졸업 후 바로 취업했지만 나는 실습하느라 취업 준비생 생활이 6개월 이어졌다.
지역아동센터 센터장 면접을 봤다. 사회 초년생이 센터장 자리 면접이라니. 면접을 보러 가는 길, 부픈 기대감에 설렜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경력 없는 사회 초년생이 서류 심사에 통과한 이유가 있었다. 면접 위원이었던 센터장이 돈과 경험, 둘 중 무엇에 가치를 두냐고 물었다. 막연한 꿈을 꾸는 나에게 현실을 직면하게 했다. 면접 위원이었던 센터장은 센터가 개소한 지 1년 미만이라 정부 보조금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센터 자비, 후원금으로 정부 보조금이 나올 때까지 운영해야 하는 상황을 설명하며 만약 함께 일하게 된다면 적은 금액을 받을 것이라고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센터장은 비록 남들보다 적은 금액이지만 첫 직장으로써 센터장 경험은 최고의 경험이 될 거라고 자부했다. 지금은 열정 페이라고 비난받을지 모르겠다. 센터장은 꿈꾸는 사람과 오래 일하기를 원했다. 그 자리에서 해 보겠다고 했다. 그때 무슨 용기로 그랬는지 알 수 없으나 지금도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어쩌면 오래전부터 마음먹은 일이라 가능했는지 모른다.
거창고등학교 직업선택 십계명이 힘이 됐다. 십계명 중 네 개가 나의 상황과 들어맞았다. 1.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2.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4.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를 택하라, 9. 부모나 아내가 약혼자가 결사반대를 하는 곳이면 틀림없다고 했다.
불안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과연 내가 잘할 수 있을까. 개소 한지 1년도 안된, 정부 보조금이 나오지 않는 센터에 그것도 센터장의 역할을 제대로 해낼지 의심했다. 배우면서 일하면 된다지만 센터를 운영할 그 어떤 경험도, 노하우도 없었다. 주변 사람들이 말렸다. 걱정하는 눈초리로 바라봤다. 특히 아버지는 저주를 퍼부으며 뜯어말렸다. 그럴 바에야 공무원 시험 봐라 고집 피운다고 핀잔을 주며 역정 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경험을 선택했다. 열악한 곳에서 경험하라는 말을 붙잡았다. 나름 무급에 가까운 센터장 자리지만 사회 초년생이 쉽게 할 수 없는 경험이라고 의미 부여했다. 어쩌면 잃을 게 없는 첫 직장이라 겁 없이 달려들었는지도 모른다.
생생하게 꿈을 꾸면 이루어진다는 말처럼 절박하게, 때론 처절하게 지역아동센터 1년을 경험했기에 꿈을 이뤘는지 모르겠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지역아동센터에서의 110만 원 첫 월급. 황무지 같았던 1년을 버티고 정부 보조금을 처음 받았을 때 그 희열이란. 지금도 첫 월급봉투를 받아 든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10년이 지난 지금, 꿈꿨던 학교에서 아이들을 돕고 있다.간절했기에 이 일을 더 사랑하게 됐다. 10년 후, 또 어떤 꿈을 꿀지 모르겠지만 어쩌면 사회복지 현장에서 그 꿈을 이루고 이어가지 않을까. 누구는 콧방귀 뀔 이야기지만 당당하게 외쳐본다. 나도 "사"자 직업이라고, 사회복지사 일을 할 때 가장 나답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