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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hoi파파 Sep 08. 2022

10년은 더 일할 원동력

"돈은 얼마나 버는데?"

"군인이나 경찰 하는 것은 어때?"

"공무원 준비해라."


"(속으로) 하고 싶고,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인 것 같아요."


아버지는 학부 시절 사회복지학과로 전과하는 것을 못마땅해했다. 그 이유는 교사, 군인, 경찰 같은 공무원을 최고의 직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여전히 돈 안 되는 일에 열심인 나를 보고 안쓰럽게 여기다. 지금도 죽을 때까지 연금이 나오는 안정적인 직장에 취업했으면 하는 을 버리지 못한 듯하다. 전형적인  걱정하는 부모의 심정이랄까. 지금이라도 공무원에 합격했다고 하면 고향에 전 씨 집안의 누구의 아들, 경축 공무원 합격이라고 대문짝만 하게 현수막을 거실 분이다.


사실 아버지의 반대에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아버지가 한창 직장 생활을 하고 있을 때 IMF 외환 위기를 경험했다. 평생직장이라고 여긴 곳에서 명예퇴직을 권고받은 것이다. 하루아침에 실직자로 내몰렸던 IMF 사태를 겪은 아버지가 월급도 적고 언제 그만둘지 모르는 비정규직 사회복지사를 좋아할 리 없었다.


가장 열악한 곳에서 일해보는 것은 어때?


학교사회복지사가 되고 싶다는 말에 아는 형님이 가장 열악한 곳부터 경험해 보라고 조언했다. 그러고는 지역아동센터에서 일해보는 것은 어떠냐고 물었다. 가장 열악한 곳에 다니는 아이들을 만나야 학생들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지 않겠냐며, 그래야 아이들을 더 사랑할 수 있다고 말했다. 뜻밖의 조언에 가슴 뛰었다. 그 뒤로 지역아동센터 일자리만 찾았다. 그때는 젊으니까 사서 고생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2009년 가을, 지역아동센터에 첫 출근을 했다. 개소한 지 몇 달이 안된 지역아동센터의 센터장으로 일하게 된 것이다. 첫 직장 치고 화려한 이력이다. 하지만 지역아동센터는 사회복지 현장에서도 열악하다고 손을 꼽는 곳이다. 그 당시 지역아동센터 장은 열정 페이나 무급으로 일했다. 정부 보조금에 센터 종사자 인건비가 포함되다 보니 생활복지사 인건비를 우선 충당해야 했다. 사업비나 운영비 쓰려면 센터장은 월급을 적게 받거나 무급으로 일할 수밖에 없었다. 


월급이라고 차마 말할 수 없는 금액을 받았다. 개소한 지 1년 미만인 센터는 정부 보조금을 받지 못하는 상황 한 몫했다. 오로지 후원금만으로 센터를 운영해야 하기 때문에 최저 임금은 꿈도 못 꿨다. 누가 봐도 터무니없었기에 주변 사람들이 열정 페이라고 안타까워했다. 하나같이 다른 곳에 일할 것을 권유했다. 하지만 뭔지 모르는 이끌림이 있었고 열정과 자부심으로 일했다. 한마디로 가슴 뛰 일이었.


"어차피 내 말은 안 들으니까"


아무리 말을 해도 듣지 않아서인지, 열악한 환경에서 묵묵히 해내는 모습을 지켜봐서인지 알 수 없으나 어느 날부터 아버지는 공무원 준비하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아들 고집을 꺾지 못한 것이다. 1년 동안 매월 30만 원 받아 가며 일할 수 있었던 것, 곧 사회복지사로서 14년 차를 바라볼 수 있는 것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꼭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고집부리는 성격 덕분다. 


"자기 경력이면 얼마든지 다른 곳에서 일할 수 있지 않아?"

어느 날 선배 교육복지사가 틈틈이 다른 일을 구해보라고 했다.


나 또한 교육복지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 사회복지학과 학생에게 흔쾌히 응원해주지 못했다. 신규 채용이 드물어 일할 기회가 없을뿐더러 점점 나아졌다고 말하는 것이 희망 고문 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불확실한 미래와 열악한 근무 환경에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교육복지사의 월급은 부족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넉넉하지도 않다. 교육복지사는 돈을 많이 벌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해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돈을 많이 벌고 싶다면 교육복지사를 하면 안 된다. 기본급은 2백만 원 조금 넘는다. 장기근무수당과 가족수당이 있지만 근무한 수와 부양가족 수에 따라 달리 받기 때문에 신규 교육복지사와 근무한 지 얼마 되지 않았거나 미혼인 교육복지사는 상대적으로 월급이 적을 수밖에 없다. 이 또한 교육공무직 유형에 따라 같은 일을 하고도 급여 차이가 난다. 지역에 따라 차이가 난다. 사립학교는 이사장의 권한이라고 교육청에서 적극적으로 보호해주지도 않는다. 근로 계약 상의 부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편들어줄 사람이 없는 것이다. 같은 일을 하면서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이 얼마나 비참한지 아는가. 


사회복지 현장에남자 동료를 만나기란 정말이지 쉽지 않다. 육복지사는 말할 것도 없다. 전북 지역 120명의 교육복지사 중에 남자 교육복지사는 손에 꼽을 정도다. 대부분 경제적인 이유로 떠났거나 경제적인 문제로 이직을 고민한다. 솔직히 나도 별반 다를 것 없다. 20, 30대 때는 적게 벌어도 혼자라서 아무렇지 않았다. 하지만 부양할 가족이 생기고 난 뒤로 먹고사는 문제가 생각보다 크게 다가왔다. 70만 원이면 족히 한 달을 살 수 있다는 20대의 경솔함은 온데간데없다. 그럼에도 현실적인 문제로 끊임없이 흔들리는 게 싫었다.


"평생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 수 없는 것인가" 


런 생각은 사회복지사로서 꼭 성공하겠다마음으로 이어졌다. 사회복지사를 하면 차상위밖에 안 된다는 람들에게 사회복지사를 하면서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오기가 생긴 것이다. 그 뒤로 악착같이 일에 매달렸다. 한계에 부딪힐 때마다 돌파하고 또 돌파했다. 오기가 커질수록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공부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이듬해 상담학 석사 과정에 입학했다. 지금은 교육복지사의 일을 하면서 또 다른 부수입을 생각하고 있다. 교육복지사의 일과 연결할 수 있는 새로운 일을 찾고 있다. 교육복지사가 아닌 또 다른 명함을 만들어 보자는 이 생긴 것이다. 


생각해보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꼭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고집부리는 성격, 사회복지사로서 반듯이 성공해 보이겠다는 오기, 무엇보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즐거움, 아이들의 변화와 성장을 가장 가까이에서 목격하는 기쁨과 뿌듯함, 남들이 보기엔 남루해 보이지만 타인의 시선과 상관없이 이 일에 대한 자부심은 여전하다. 어쩌면 14년 가까이 사회복지사의 일을 하면서 재미를 느끼고 좋아할 수 있었던 원동력임에 틀림없다. 10년은 더 일할 원동력임을 부정할 수 없다.


https://v.daum.net/v/202111011716084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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