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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윤인경 Oct 02. 2024

시인은 어떤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하는가

시 이야기

소설가 성석제의 동생이자 작가인 성우제는 1985년 고려대학교 불문과 4학년 봄학기에 오탁번 교수(이하 오교수)가 강의하는 <현대시선독>이라는 과목을 국어교육과에 가서 듣게 된다.

오교수는 시험 대신 '현역 시인에게 편지를 써서 답장을 받으라.'는 과제를 받게 된다. 이에 자신의 형과 친분이 있고 스스로도 잘 알고 있는 기형도 시인에게 '시인은 세상을 어떤 눈으로 바라봐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편지를 보냈다.

4월30일 당시 스물 다섯 살이던 기형도 시인은 아래와 같이 친구 동생이자 시를 사랑하는 한 청년에게 다음과 같이 답장을 보내왔다.


우제에게


 편지를 읽고 한참동안 생각했다. 난 자네에게 해 줄 말을 별로 가지지 못했다. 그 이유는 이렇다.

   시적 대상의 출발은 사상(事象)에 있는 것이고 시가 어떠한 형식으로 그 사상들을 변형시킨다 해도 실재로 존재하는 세계는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다. 이것은 결국 사상을 의미화시키는 것은 개인으로서의 시인의 인식망(認識網)이고 그 인식망은 간혹 여러 시인들에게서 함께 보여지기도 하나 본질적으로는 한 개인이 갖고 있는, 가져야만 하는 특수한 세계관(世界觀)의 틀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러한 개인의 인식망을 통해 변형되는 창조적(創造的) 세계 – 혹은 허구적(虛構的) 세계가 설득력을 지녀 당위적인 준(準)실재의 세계를 이룬다 하더라도 그 실천적 힘(변혁의!)의 분배물은 독자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자네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존재하는 세계에 대한 시인들의 개별적 흡수력>에 제한돼 있고, 흡수 이후의 문제는 철저히 자네 만의 것이라는 말 뿐이다. 대학 시절 내내 나를 놓아주지 않았던 것은 인식욕(認識慾) 뿐이었다.

    그러나 내가 가진 인식의 무기는 감각(感覺)뿐이었다. 존재하는 것은 사실 뿐이었고 가치란 혼돈의 질서 속에서 헝클어져 있었다. 그것도 대개는 성급한 것이었거나 가공의 것들이었다. 나는 제자리로 돌아갔다. 인식의 노획물들로서의 사실들은 그것이 공리(公理) 혹은 당위(當爲)로 검증될 때 불분명한 가치를 향한 지표(指標)들이 되어주었다. 시의 원칙(原則)으로서의 창조적 공간은 그것이 탐미적 세계이든 준열한 현실의 세계이든 (고정)관념이 아닌 인식(認識) 이후에 이루어졌다. 젊은 이들을 항상 괴롭혀 온 순수나 참여 문제 또한 그것 속에서는 소재주의(素材主義)(오해말도록!)와 비슷한 것이었다.

    글을 쓰면 쓸수록 논리(論理)는 또다른 논리를 낳고 그 파생되는 논리의 방향은 갈수록 구체성에서 멀어지는 것 같다. 그것 보렴. 내가 자네에게 해 줄 말이 무엇이 있겠는가. 내가 포기한 대화 속에는 순수한 미적 세계나 모순 투성이의 현실이 있다. 그것은 자네의 몫이다. 이번 편지 속에서 내가 대화의 방법으로 택한 추상적 진술이 가능한 한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한 의도에서 쓰여진 것 같기도 해 미안하다. 다음에 만나 재미있는 대화를 갖자. 마지막으로 고대문학회에 안부 전한다. 연대 애들과도 잘 지내렴

                                           - 1985. 4. 30 형도 兄 쓰다 -

    기형도 시인은 그에게 아니 시를 사랑하는 지금의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시인은
혼란스러운 현실과 사유와 인식을 통한 창조적, 때론 허구적 세계 사이에서 사상을 의미화시켜야 한다. 그럼에도 구체성을 잃지마라.
논리와 논리의 꼬리를 무는 관념의 모호성을 경계하고 자신의 창조한 세계에 대한 실천적 힘인 분배 몫은 독자들에게 맡겨야 한다.

 


    그와 밤새 인식에 대해, 감각에 대해, 시인의 세계관에 대해, 그리고 노래할 시에 대해, 들어줄 독자에 대해 술 한 잔 기울이며 이야기하고 싶다.

   1982년 안양의 문학 청년 모임인 <수리문학회> 회식 자리에서 술값을 낸 여성회원들에게 아래의 서정시를 써서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때를 기억하는 한 여인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의 24살 눈을 기억한다." 

    나는 지금 그의 눈과 마주하지 못한 절망감을 경험 중이다. 

    시인으로서 내가 가져야 할 사상은 무엇이고, 세계관은 무엇이고, 남들과는 다른 무기는 무엇이며, 나의 시가 누군가와 공유될 수 있는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민들이 나를 성장하게 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나를 내면 깊숙한 곳에서부터 갉아먹고 있는 것인지 묻고 싶어 그와의 시간과 술 한 잔을 갈구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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