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놓고 자랑질을 하자면, 내 며느리는 요리를 잘한다. 그냥 잘하는 게 아니라 입이 쩍~~~ 벌어지게 잘한다. 페투치니를 직접 만들어 파스타를 완성하고, 마더 도우(mather dough)를 이용해 천연 발효 빵과 피자를 구우며, 온갖 케이크를 날 것의 재료로부터 뽑아낸다. 게다가 생선 요리할 땐 핀셋으로 미리 가시를 제거해서 먹는 이로 하여금 황송함을 느끼게 한다. 내가 아들에게 해온 밥상머리 교육이, ‘결혼하면 네가 생선 가시를 발라 아내에게 줘야 한다’(고백하건대, 아들의 생선 가시는 내가 발라줬었다)였는데, 괜한 수고를 했나 보다.
이십 대의 아이가 어떻게 그런 짱짱한 요리 실력을 갖출 수 있을까? 요즘은 요리에 관한 정보를 얻기 수월해서일까?
라떼에는 요리책을 뒤지거나 어깨너머로 배워 음식을 했지만, 요즘은 천지 때깔이 레시피인 세상이다. 티브이를 보며 메모하고, 잡지를 찢어가며 고군분투했던 나의 과거에 비하면 요리하는 게 참 쉬워졌다. 그렇지만 어떤 이유를 들이댄다 해도, 내 며느리의 실력에는 토를 달 수가 없을 것 같다. 요리를 배운 적도 없는 아이가 꼴랑 몇 년 안에 그만한 성취를 이뤄냈다는 건 타고난 재능이라고 보는 수밖에!
그 대단한 며느리 아니, 큰딸(우리 집에선 친딸은 작은딸, 며느리는 큰딸로 통한다)이 내게 김치 담그는 법을 물어봤다. 내 김치의 비법을 알고 싶단다. 그러잖아도 별의별 요리를 다 하면서 김치를 시도해보지 않는 것이 이상했는데, 역시 좋아하는 일에 관한 관심은 확장되기 마련인가 보다. 사실 아들 내외는 전 세계 음식을 두루 섭렵하며 살기에 많은 양의 김치가 필요하지 않다. 그래서 내가 아주 가끔(아들은 미국, 우리는 캐나다에 살기 때문) 주는 김치로 충분하지만, 이젠 직접 담가 먹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간 너무 고생 많으셨다며, 코로나가 끝나면 김치 맛보러 미국에 오시라는 예쁜 초대의 말까지 건넨다.
비법을 알고 싶다는 찬사에 완전히 들뜬 나는 삼십여 년의 노하우를 있는 데로 풀어놓았다. 배추를 쪼개는 방법부터 절이고, 씻고, 물을 빼고, 양념을 버무리는 모든 절차를 탈탈 털어 아낌없이 내주었다. 특히 절이는 과정을 강조해가면서.
김치는 양념보다 절이는 게 더 중요해.
양념이 더 중요한 지 알았다고?
잘 생각해봐.
양념은 나중에 고칠 수 있지만, 일단 버무린 김치는 다시 절일 수가 없잖아.
그러니 절일 때 더 많은 정성을 들여야 해.
덜 절이면 김치가 물러지고, 너무 절이면 짜게 될뿐더러 발효도 늦어지거든.
소금의 양이나 시간은 정확히 알려줄 수가 없단다.
배추의 크기와 두께가 다 다르고, 소금도 염도 차가 있거든.
그러니 잘 봐가며 절이는 수밖에 없어.
굳이 수치를 말하자면 보통 장아찌를 담글 때 소금과 물 비율이 1:10이니 거기에 맞추면 될 거야.
나만의 절임 비법을 알려주자면, 난 배추 절이는 시간을 5~6시간 정도로 짧게 해.
밤새 절이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렇게 하면 배추의 단 맛이 빠지게 돼.
그래서 나는 빨리 고르게 절이려고 애써.
그 방법은.....
첫째, 뜨거운 물에 소금을 풀어서 쓰면 배추가 빨리 절여진단다. 그러면 배추가 익어버리지 않나고? 그런 걱정은 말아. 배추가 차갑기 때문에 물은 어차피 식게 돼있어.
둘째, 배추 잎사귀 사이마다 소금을 살살 넣어줘. 흔히들 배추를 반으로 가른 뒤에, 그 위에 소금을 얹어주는데, 그러면 시간이 오래 걸려.
셋째, 배추를 소금물에 담글 때, 줄기(뿌리 쪽)를 아래쪽으로 했다가, 나중에 잎사귀 쪽을 물에 담가줘. 이렇게 하면 줄기와 잎사귀가 고루 절여지겠지?
넷째, 절인 배추를 씻을 때, 마지막 헹굼물에 소금을 약간만 풀어줘. 그렇게 하면 배추가 차분해진단다.
김치 양념의 비결을 알고 싶어 했던 큰딸은 양념보다 배추를 절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내 말에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그렇지만 그 이치가 이해 간다며 수긍을 했고, 후일 완성된 작품을 보내왔다. 사진을 보니 다른 음식처럼 김치 또한 얌전하고 정갈했다. 손끝이 야무지다 보니 첫 작품이 아닌 첫 작품을 탄생시킨 것이다. 김치 맛은 아들이 보았으니 패스! 다만 한 가지, 허연 배를 드러내고 누워있는 백김치의 불손한 자세가 눈에 거슬렸다. 배추는 자른 단면이 땅을 바라보고 있어야 하는데, 이건 순전히 내 실수다. 보관 방법 또한 설명해줬어야 했다.
나는 당장 문자를 날렸다.
김치는 생물이라 잘 보관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잡균이 번식해서 맛이 변하거든.
첫째, 김치는 계속 발효되는 음식이라 공기와의 접촉을 최소화하는 게 좋아. 작은 통, 또는 비닐에 소분해서 보관하도록 해. 랩을 덮어 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야. 그리고 배추는 엎드려 있는 자세가 바른 자세야. 자른 단면이 하늘을 향하면 벌려진 잎사귀 틈새로 공기가 들어가기 쉽겠지?
둘째, 김치에는 절대 이물질이 묻어서는 안 돼.
잡균 번식을 막기 위해서 김치는 깨끗하고 마른 손으로 만지도록. 그리고 먹던 김치와 새 김치도 동거시키지 마. 이건 된장이나 고추장처럼 균이 살아있는 모든 음식에 해당되는 얘기야. 얘들은 이물질의 침입을 받으면 인생을 포기해버린단다.
셋째, 김치는 밑의 것부터 꺼내먹는 게 좋아. 염분이 아래로 내려가기 때문에 위에서부터 먹으면 아래쪽 김치는 점점 더 짜지거든. 그리고 국물에 잠긴 김치가 먼저 맛이 드니, 그것부터 먹는 게 맞겠지?
힘들게 한 김치를 맛있게 먹길 바라는 마음에서 보낸 까탈 맞은 조언이었다. 내 진심을 아는 큰 딸내미는 고맙다는 답을 보내왔다. 막연한 꿀팁 같은 것보다 이론이 적용된 이런 비법이 더 좋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이런 반응은 “그 엄마에 그 딸”이기 때문이라는 감동적 멘트까지 곁들였다.
피가 아닌 삘이 섞인 우리 모녀(?)는 둘 다 오타쿠적 기질이 다분하다. 좋아하는 일이 있으면 죽어라 파고들고, 끝을 보려는 근성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삘의 성취를 위해서라면 서로 대놓고 조언하고 쿨하게 받아들인다. 예컨대 내가 브런치에 응모하려 할 때, 국어 공부를 권유한 이가 바로 그 아이였고, 나는 국립 국어원 사이트를 들랑거리며 공부했다. 아직도 띄어쓰기와 정확한 한글 표기가 헷갈리지만, 덕분에 386세대의 맞춤법을 버린 것에 만족한다. (아직 아닌가?)
이제 나는 아들 내외를 위한 김치 노동에서 해방되었다. 배추 한 박스를 사서 김치를 담그고, 냄새가 안 나게 겹겹이 포장을 하는 극성을 더는 이상 떨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마음 한구석이 휑해진다. 두 아이와 나를 연결하고 있는 끈 한 개가 떨어져 나간 느낌이랄까?
주책스런 생각을 떨치려 고장 난 내 몸뚱이를 바라보았다. 자식들 키우느라 여기저기 망가졌건만, 아직도 나 자신에게 들볶이고 있었다. 자기 짝을 찾아 예쁘고 잘살고 있으니 인자한 부모 미소만 지어주면 그만인 것을...... 모성이란 얼마나 미련 맞은 것인지! 이 미련함이 도를 넘으면 내 아들 먹이라고 억지로 김치통을 떠안기는 시어머니가 되는 것 아닌가. 물론 내 김치는 아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지금 가지고 있는 오지랖과 집착을 거둬들이려 한다. 이제부터는 김치 보따리 없이 여유 있게 아이들을 만나야겠다.
그나저나 이 지긋지긋한 코로나는 언제 끝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