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의 아홉 번째 편지
이번 편지는 꽃피는 봄과 함께 왔네요. 환영합니다!
대전은 이번 주에 벚꽃이 만발한 뒤에 질 것 같아요. 늘 그랬듯 한 주 정도 화려함을 자랑하다가 봄비가 오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스러지겠지요. 벚꽃을 보면서 생각해요. 화룡정점. 절정은 곧 위기다. 절벽으로 뛰어내리기 직전의 아슬아슬한 화려함. 순식간에 질 벚꽃을 보면서 위기감을 되새겨요. ‘위기인 줄도 모르는 위기’로 치달으려는 나의 본능이야말로 위기다. 삶의 너른 언덕, 광활한 대지는 보지 못하고 한철 꽃에 취해 살지는 않는지 반성도 해 보아요. 마음을 모으고 기다려요. 형형색색 화려함이 지나고 다가올 푸릇푸릇한 싱그러움을 기다립니다. 나의 내면 깊은 곳에서도 화려함에 도취되지 않는 푸른 기상이 솟아나길!
왠지 감격에 젖어 시 같은 소리를 늘어놓아 버렸네요. 선물님이라면 이해해주시리라 믿어요. 이런 저인 걸 알고 함께 편지를 주고받고 있는 거겠지요?
이번에 보내주신 편지를 읽으면서 왠지 작가님의 글답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뭔가 두서없는 느낌이랄까요?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갈피가 잘 안 잡혔어요. 꽃향기에 취해 들떠 있는 제 마음이 제멋대로 읽은 까닭일 수도 있겠지만. 말씀하셨듯이 고속도로를 달리는 와중에 쓴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듯 했어요. 그리고 한편으로는 마음이 편했답니다. 작가님이 이렇게 쓴다면 작가의 발치도 못 따라가는 나는 정말 마음 편히 써도 되겠다! 나의 의식의 흐름을 두서없이 적어도 되겠는걸! 용기가 나더라고요. 고마워요 작가님. 이번 편지, 선물님이 의도하셨든 안 하셨든 나에게 정말 선물이 되어 주었어요. 아마 그래서 이 편지 초반에 벚꽃 이야기를 아무렇게나 늘어놓았나 봐요.
결혼에 대해 이야기하셨는데 그에 대해 한 마디하고 싶어요.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결혼은 사랑의 완성은 아니다. 오히려 사랑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사랑의 완성을 한 번쯤은 경험해보고 싶어서 하는 사회적인 계약, 동맹이 결혼 아닐까요? 그러니까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 좀 제대로 해보자고 둘이 의기투합하는 게 결혼이라는 거죠. 다른 말로 하면 사랑이 뭔 줄도 모르고 하는 것이 결혼. 다들 그렇게 결혼하는 게 아닐까 해요. 어른이 되는 법을 모르고 어른이 되고 부모가 되는 법을 모르고 부모가 되듯이. 아내와 남편이 되는 법을 전혀 모른 채 결혼을 하는 것이 우리 보통 사람의 모습 아닐까요?
그렇다면 외로움은 필연이겠지요. 결혼은 외로움의 증거예요. 결혼은 내가 뿌리깊이 외롭다는 외침이지요. 결혼은 외로움을 대놓고 표현할 자유를 허락해주어요. 한평생 서로 외롭지 않게 해주겠다고 약속을 했으니 얼마든지 외롭다고 말할 수 있게 되는 모순. 그 모순 속에서 일명 ‘어른이’들이 갈팡질팡해요. 결혼하면 안 외로울 줄 알았는데 더 외로운 것 같은 이건 뭐지! 결혼은 ‘문득 외롭고 황홀한(황홀할 줄 알았던) 심사’입니다. 자칫하면 꽃이 진 뒤의 푸름은 전혀 볼 줄 모르는, 그리하여 삶의 싱싱함을 잃고 마는.
선물님이 결혼을 대단한 것으로 묘사한 것 같아서 다르게 이야기해보았어요. 선물님이 쓰신 그대로 결혼에 대한 상식적인 관념을 ‘포기하고, 양보하면서 균형을 이루려고’ 다른 이야기를 던져 보았어요. 아마 제 짐작이 맞는다면 선물님의 구미에 꽤나 당기는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해요.
이제 외로움에 대해 이야기해보아요. 외롭고 싶다고요? 외롭지 않으면 사랑도 없는 법이니 남들보다 외로운 선물님은 사랑이 많은 사람이군요. 외로움을 좇는 사람이 아니라 더 많이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라고 재명명해봅니다. 심리치료에서도 자주 쓰이는 기법이지요. 어때요? 마음에 드나요?
제가 보기에 선물님은 사람을 좋아해요. 단지 착해서, 선하게 사는 게 좋아서 자기의 시간을 남에게 쓰는 게 아니라는 걸 본인은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천성이 그런 사람인 거죠. (그러니 그만 인정해요.) 저는 아무래도 그렇게 못하거든요. 사람에게 다가가고 싶어도 수줍어서 자꾸 숨을 수밖에 없는 걸 이해하나요? 이건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다, 어떻게 살고 싶다.’라고 하기 전에 본능적인 반응이에요. 그런 갈망이 엄청 커서 본능을 거스르는 거야, 라고 혹시 말한다면 콧방귀도 안 뀌어질 거예요. 이건 그보다 훨씬 앞선 원초적 반응이니까요.
이쯤 생각을 하다 보니 선물님께 묻고 싶네요. 선물님은 정말 외로울 줄 아나요? 자신이 정말 외로움에 대해 안다고 생각하나요? 연결의 맛을 잠시라도 맛본 게 아닌, 연결의 상상을 잠시라도 품어 본 적이 없는, 연결의 가능성을 한 번도 떠올려보지 않은 어떤 존재의 외로움이라 칭할 수도 없는 외로움을 우리가 알 수 있을까요? 비유하자면, 처음부터 끝까지 사막에 홀로 서서 일생을 다하는 나무가 어떤 심정인지 알 수 있나요?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던졌으니 냉큼 다른 주제로 꽁무니를 뺍니다. ‘방황하냐고 물어보면 지금은 그렇지 않으려 애쓴단 말을 할 것 같아서’라니! 제 속내를 꿰뚫었다고 기대했겠지만 그건 반은 맞고 반은 틀려요. 제 진심에 가까운 말은 다음과 같답니다. ‘이제는 좀 더 잘 방황하고 싶어요. 앞으로 점점 더.’
여태 정신적으로 방황하면서 살아왔더니 이건 나의 숙명이라는 생각도 들고,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살 거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사람이 어디 가겠어요. 살던 대로 살겠지요. 포도나무가 포도를 맺지 달리 뭘 맺겠어요. 쓸데없이 고민하는 나, 평생 이렇게 살아온 나를 굳이 바꿔야 할까 싶어요. 바꿔보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잘 안 바뀌었으니 이제는 이 모양 이 꼴대로 잘 살아보자고 마음먹어요. 어차피 이렇게 해도 근심 걱정, 저렇게 해도 고민이라면 조금이라도 나에게 스트레스를 덜 주고 싶어요.
‘안 변해도 된다. 이렇게 살아도 멋지게 살 수 있다. 넌 너만의 멋이 있느니라. 그걸 꺼내면 된다.’ 이런 식으로 내게 이야기하려고 해요. 예전에 선물님이 알던 저답지 않죠? 이제 저도 나이가 들었거든요. 세월이 제게 약을 주었어요. 안 그래도 생각이 복잡한데 이래저래 뜯어 고치려고 더 복잡하게 만들게 뭐 있겠어요? (라고 겉으로는 대차게 이야기합니다.) 생각이 많아서 아이디어가 넘쳐나기도 한 것이니 내 나무에 열린 포도의 탐스러움에 집중하려 해요. 내게는 왜 사과가 아니라 포도만 있냐고 따지던 것, 내 포도는 왜 이리 시냐고 불평하며 살아온 건 지금까지의 세월이면 충분한 것 같아요. 오 맙소사. 정말 오랫동안 그렇게 살아왔어요.
안 하고 싶은 선택이 있냐고 하셨죠? 이거예요. 나를 억지로 개조시키려는 노력은 안 하고 싶어요. 그렇다고 세상과 나 자신에게 완전히 순응하며 살 것인가? 그것도 아니에요. 그렇게 지향은 하겠지만 실제로 그렇게 살지는 못할 거예요. 점점 앞으로도 끊임없이 내 삶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겠지요. 오늘도 잘 살아보겠다고 새벽 4시에 일어났고 독서를 하다가 5시 30분에 후배랑 온라인으로 심리학 스터디를 시작했고 7시 30분 쯤 마치고 아침은 가볍게 먹는 게 몸에 좋은 것 같아서 오이, 토마토, 사과를 통째로 씹어 먹었어요. 너무 일찍 일어나서 아침부터 졸리니 좋아하지도 않는 커피를 좀 마셨고 그러고 나서 이걸 쓰고 있네요.
누군가 보면 열심히 사는 것 같지만 예전보다는 애쓰지 않고 살아요. 고민도 덜하고 스트레스도 덜 받아요. 그러니까 변화하려고 애쓰지 않으면서도 변화하는 묘수를 부리는 중이지요 하하하. 변화를 선택하는 것도 아니고 정체를 선택하는 것도 아니랄까요? 변하지 않는 것을 선택한 듯하면서 변하는 길을 가는 선택을 했다고 할까요? 양 단 어디를 선택하지도 않고 내 안의 포도가 풍성하게 열리도록 허용하고 있다고 말하면 좀 더 맞는 말일 거 같아요. 이렇게 적고 보니 제가 존경하는 노 스승님(노자)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있는 것 같아 뿌듯하네요!
선물님은 자기 자신에게 무엇을 허용하나요?
위에서 물었던 외로움에 대한 선물님의 답변도 궁금하네요. 참 선물님이 이번 편지에서 무슨 얘기를 하고 싶었는지 또렷이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그보다는 불규칙한 용기가 참 반가웠어요. 앞으로도 얼마든지 용기를 내주세요.
2023. 03. 25. 10:46 대전에서 상담사 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