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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물작가 윤 Oct 20. 2024

나로 살아가기

선물작가의 열여덟번 째 편지

진정한 연금술은 자기 자신을 향한다는 말이 내내 마음에 와닿았어요.

우리는 매일 나와 살아가지만, 나로 살아가진 못하는 때가 많은 것 같아요. 대리, 팀장, 과장 같은 직함으로, 아빠, 딸, 친구라는 관계로, 심지어는 모르는 사람까지 신경 쓰며 살아가기도 하죠.


전 타자가 꽤 빠른 편이에요. 사실 요즘엔 다들 컴퓨터에 익숙해 타자가 다 빠르지만, 노트북이 아닌 컴퓨터실에 가서 컴퓨터를 쓰던 대학 시절을 보낸 세대에선 압도적으로 빠르죠. 그 이유는 열심히 노력해서예요. 버스를 타고 가면서 보이는 간판들을 허벅지에 타자로 치면서 자리를 외우며 속도를 올렸고, TV에 나오는 대사를 들으며 허공에 타자를 치기도 했죠. 그때 노력은 제가 오롯이 잘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한 사건 때문이었어요. 당시 수능이 끝나고 워드프로세서며, 정보기기기능사, 정보처리기능사 같은 전공과 상관 없이도 시대의 변화로 컴퓨터 학원이 유행이었어요. 두 달을 다녔는데 한 친구가 절 꾸준히 놀렸어요. 

“손가락이 통통해서 자판이 동시에 눌리니 타자가 느린 거 아냐?” 아마 별 생각 없이 했을 수도 있는데, 죽자고 달려들어서 시간이 지난 지금도 줌 회의가 끝날 때 회의록에 표까지 만들어 완성할 정도로 타자가 빨라요.     

문득 나무님의 편지를 받고 이런 식으로 익혔던 것들이 정말 나로 살았던 걸까? 하는 의문을 갖게 했어요. 불행은 남과 비교할 때부터 시작된다고들 하는데, 제 원동력이나 열정의 어느 부분은 질투나 부러움, 아니, 사실은 자기 비하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된 건 아닌가 싶어요. 

자기 비하는 나와 살아가는 또 다른 내가 하는 것 같아요. 사실 칭찬받고 싶고, 잘하고 싶고, 뭔가 해내고 싶고, 내가 그럴 수 있을 거라 믿고 싶은데 나로 살지 못하고, 나에게 또 다른 내가, 혹은 나와 살아가는 다른 내가 스스로 불안을 심고, 비하하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니 진실로 자신에게 솔직하고, 진심으로 선한 나로 살 때 당연히 그 자체가 빛나서 선한 영향을 끼쳐야 하는데, 끼치고 싶다는 열망, 끼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더 커서 제대로 된 방향으로 가지 못하고 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뭘 했게요?

제쳐뒀던 일을 더 제쳐두었어요. 물론 일을 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에요. 분리하려고 노력했다는 게 맞겠네요. 겨울이 끝나가고 봄이 오는 3월과 4월은 예술인들에게는 공모가 많은 달이에요. 일 년 살아갈 씨앗을 뿌리는 시기라 많은 서류를 붙들고 있어야 해요. 어찌 보면 창작이 주업인 예술가들에게는 이게 밥줄이자 창작할 수 있는 기반이면서도, 많은 행정에 눌리기도 하죠. 게다가 공모에 낸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니니 더더욱 미궁 속에 있는 기분이에요. 될지 안 될지 알 수 없는 지원서를 매년 씨앗을 뿌려야 하니까요. 

하지만 씨를 뿌리는 만큼, 나로 살아가는 걸 하기 위해 일주일에 한 번씩 서울에 와서 공연을 봐요. 그리고 책도 읽어요. 보통 소설이나 철학책인데 제가 부족했던 게 뭔지 좀 더 보이기도 하고, 철학자의 한 문장에 깊게 사색하기도 해요.

무엇보다 서울에 다녀가는 건 뭐랄까, 영월에 있으면서 낯설어진 공기가 좋아요. 영월 토박이들은 서울에 가면 정신없어 싫다고 하고, 귀촌한 사람들도 서울 생활에 질려 온 사람들이라 서울을 좋아하지 않아요. 어쩌면 전 서울에 질려서가 아니라 영월에 일 년 살아보러 왔던 사람이라 그런 걸까요? 원래 북적이는 걸 좋아하지 않았었는데, 스타벅스가 아니라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카페, 대중 속에 섞이는 기분을 느끼고 싶었던 것 같아요. 고향을 떠나 살고 싶던 마음이랑 같달까요?


오늘은 5월 초에 볼 뮤지컬의 원작 소설을 기차에서 오가며 읽고, 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에서 있던 실내악을 들으러 다녀왔어요. ‘음악의 이해’ 같은 교양 수업 때문에 왔던 연주회 이후 체임버홀은 이십 년만이었어요. 클래식을 가끔 듣고, 바흐는 즐겨 듣고, 어느 프로그램 중 사중주를 듣거나 첼로나 피아노 연주를 듣는 건 곧잘 있는 일이지만, 온전히 클래식을 들으러 온 건 정말 오랜만이었어요.

F.Ries의 플루트,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를 위한 4중주 제 1번 C장조 Op.145가 첫 곡이었는데, 뒤에 익숙한 모차르트, 슈베르트, 드메스르망의 ‘윌리엄 텔’보다 처음 듣는 이 작곡가의 음악에 그만 눈물이 흘렀어요. 일단 졸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과 달리 제가 아직 클래식을 들을 마음의 귀가 있단 것에 놀랐고, 사 악장의 색이 모두 다른데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단 것에 놀랐어요.

예술을 통해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게 아닐까 싶었어요. 최소한 전 그랬어요. 어쩌면 예술은 사치처럼 보일지도 몰라요. 먹고 사는 문제에 직결되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먹고 사는 문제에만 매달린다면 우린 인간일 수 있을까요? 인간이란 종이 우월하단 얘긴 아니에요. 사실 지구엔 모두가 배고파서 죽지 않을 만큼의 식량이 있죠. 나누지 않아서 부족할 뿐, 누구도 먹고 사는 문제에만 매달리지 않아도 되는데 ‘무엇’을 먹고 ‘어떻게’ 사느냐 때문에 그 문제에 매달리는 것 같아요.


여기서 다시 나로 살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무엇을 먹고, 어떻게 사느냐와 비교하고 그렇게 되기 위해, 혹은 더 뛰어나기 위해, 더 타자를 빨리 치고, 더 많은 자격증을 따기 위해, 그만 인간스러움을 놓치지 않았었나하는 생각을 했어요. 어쩌면 일곱 살 이른 아침 TV에서 보고 들었던 ‘세계의 명곡’을 좀 더 귀기울여 들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어떤 방식으로든 예술을 접할 기회는 많았는데, 하는 후회가 되었어요.

순수 예술은 상업성과 대중성은 부족할지 몰라도 인간으로 사는데 기반이 되어야하는 것 같아요. 전보다 더 접할 기회가 많아졌는데도, 유튜브에서 얼마든지 좋은 연주를 무료로 볼 수 있고, 각 지역마다 무료 공연도 많은데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냐고, 먹고 살기도 힘겹다고, 시간 내는 게 그렇게 쉬운 줄 아냐고 하다 보면 나로 살아갈 시간을 놓치는 것 같아요.


사중주를 들으며, 책을 읽으며, 저는 비로소 나로 살아간단 생각이 들어요. 그 감성을 오롯이 느끼고, 생각하고 그것들을 소화해 제 일과 연결하고요. 예술가라 그럴지도 모른다고 나무님이 말할 것 같기도 해요. 어쩌면 같은 예술 분야라 그럴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제가 문화기획, 사회복지, 심리학 같은 분야를 할 때도 그랬던 것 같아요. 전공 책, 일터에서만의 열정으로는 타인의 눈치를 보거나, 타인을 기준으로 살아가는 기분이었어요. 하지만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드는 예술을 통해 나로 살면, 같은 일도 다르게 보이더라고요. 좀 더 삶에, 사람에 너그러워진다고 할까요? 


제가 예술이란 사치를 즐기기에 실제로 가난하고, 서울에 오가는 차비를 모으려 애쓴다는 걸 나무님이 잘 알기에 제가 저로 살아가려고 애쓴다는 제 말을 이해해 줄 것 같아요. 사치가 아니라 예술은 인간이 살아가는데 너무나 필수라는 걸, 기차가 덜컹거리네요. 선로에서 벗어나지 않고 행선지까지 잘 가려면 많은 요소가 필요하겠죠. 무생물인 기차도 이런데, 살아있는 인간은 얼마나 많은 요소가 필요할까요?

그중 놓치기 쉬운 요소가 예술이 아닐까 싶어요. 유튜브, 넷플릭스, 코인노래방 말고 순수 예술에 해당하는 클래식, 연극, 무용, 회화 전시 같은 것들이요. 몇 년도에 그렸는지, 스승이 누군지, 이런 거 말고, 순수하게 작품을 통해 나를 느끼고, 나로 생각하며, 그것들을 삶에 녹여내어 살아갈 때, 우리는 나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나무님은 무엇이 나로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게 하나요?


24.04.25. 새벽 1시 1분. 서울에서 영월오는 기차에서 쓰다가 이어서 마무리한 편지. 영월에서 선물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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