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의 열아홉 번째 편지
선물님, 지금 영월의 날씨는 어떤가요? 여기는 봄비가 내리고 있고요. 꽤 쌀쌀한 느낌이에요. 어제 엊그제만 해도 한낮에 너무 더워서 벌써 여름이 왔냐고 했는데. 오늘은 그만 약간 두터운 갈색 후드티를 꺼내 입었답니다. 어제는 여름, 오늘은 다시 겨울. 이 변화무쌍한 날씨 앞에서 곱게 빨아서 옷장 깊숙이 집어넣었던 겨울 후드티를 꺼내면서 생각했어요. 변화무쌍한 것 앞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 내 안에 변하지 않고 영원한 것은 무엇일까. 내 안에 고이 머물다가 내가 진심을 다하면 언제든 꺼낼 수 있는 것, 깊이 내재되어 있어 평소에는 인식하지 못하고 살지만 나를 진정 나답게 만드는 것. 그래서 언제나 나 자신과 연결시키는 것은 무엇일까. 선물님은 그걸 예술이라 부른 것 같아요.
선물님 편지를 읽고 가장 먼저 ‘사람이 밥심으로만 사는 게 아니다.’라는 말이 떠올랐어요. 사람은 빵만으로 사는 게 아니라는 성경 말씀도 있지요. 먹고사는 문제야말로 인간에게 가장 원초적인 문제이긴 하지만 먹고사는 문제만 문제일 때, 그게 가장 큰 문제일 때, 인생은 정말 문제가 아닌가 생각이 드네요. 인생의 가장 화급한 화두가 먹고사는 것뿐이라면 인간다움은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겠지요. 당장 인간다움을 찾을 수 없는 인간의 삶이라면 과연 그 삶을 인생이라 부를 수 있을까요. 그 인간다움은 어디에서 올까요? AI가 인간의 상당 부분을 빠르게 대신하고 있는 이 시대에 인간다움이란 무엇보다도 놀 줄 아는 인간성에서 올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한쪽에서는 AI로 인해 생산성을 극도로 끌어올릴 수 있다는 축배를 들 때 다른 한쪽에서는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가 저 구석에서 엉덩이를 긁으며 도무지 생산적이지 않은 뻘짓에 꽂혀 낄낄대고 있을 거예요. 고도의 수학적 통계와 정밀한 계산을 통해 움직이는 AI는 놀이하는 인간을 흉내낼 수는 있겠지만 놀이하는 정신을 이해하지는 못하지 않을까요? 전혀 생산적이지 않게 아무렇게나 놀 줄 아는 인간. 그 인간다움, 놀이하는 정신이 결국 예술일 거예요. ‘선물님은 인간성을 누리고 있구나! 더 나은 인간이 아니라 더 나인 인간이 되고 있구나!’ 선물님 편지를 읽고는 이런 생각에 흐뭇했어요.
근데 생각은 저렇게 멋지게 정리했지만요. 사실 예술은 저에게 거리가 좀 먼 이야기라 편지를 받고는 뭐라 답해야 하나, 생각을 좀 묵혀두었어요. 선물님의 품격에 걸맞게 예술에 대한 예를 들고 예술적인 묘사를 하며 예술적인 답장을 보내고 싶으나 –선물님이 ‘체임버홀, 4중주 제 1번 C장조 Op.145’라는 엄청난 외계어 문자를 쓰는 바람에 기가 팍 죽어버렸어요.- 도무지 그럴 재주가 없어서 머릿속에서 며칠 ‘예술, 예술, 예술’ 단어만 굴렸어요. 그 예술이라는 단어가 주는 위화감 덕분에 저를 돌아보게 되었답니다. ‘나는 왜 예술 앞에서 초라해지는가?’ 화두처럼 들고 며칠을 있었어요. 고구마 먹고 체한 것처럼 뭔가 묵직하더라고요. 차츰 화두가 명치 정중앙을 송곳처럼 찌르기 시작했어요. 피할 길이 없었어요. 나야말로 먹고사는 문제가 가장 큰 문제인 인간 아닌가.
예술에서 구만 리 떨어진 내 삶을 보면서 살짝 마음이 가라앉았어요. 직장인일 때에는 하루에 얼마를 버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자영업자 신분이 되자 매일 내가 얼마를 버는지 숫자로 찍혀서 바로 알 수 있어요. 그러다 보니 하루살이처럼 매일 숫자를 확인하며 안도와 두려움 사이를 오가는 경험을 하게 됐어요. 그게 참 무시무시하더라고요. 매일 매일 나의 값을 정산하는 삶. 오늘 나의 밥값이 더 많이 나가는지 아니면 오늘 나의 몸값이 더 많이 나가는지 매일 확인하게 되는 삶이요. 어쩌면 이게 정상적인 삶일 지도 몰라요. 자연 생태계에 월급제로 삶을 보장받는 경우는 없고, 야생 동물은 매일 생존의 위기를 넘나들 테니까요. 하지만 인간으로 태어나 한평생 이렇게 살아본 적이 없으니 무척 두려웠던 순간도 있었어요. 매일 밥값, 몸값을 생각하는 삶 속에서 예술이라니요. 선물님의 예술 같은 소리에 가슴도 머리도 턱 하고 막혔던 거 같아요.
막히면 뚫어야겠지요. 뚫으라고 막히는 거예요. 한번 시원하게 갈아엎으라고.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그런데 애초에 왜 막힐까요? 막히는 좁은 곳으로 가니까 막히는 거겠지요. 너무 많은 게 너무 좁은 길을 통과하려니까 막히는 거잖아요. 탁 트인 대로로 가면 막힐 게 처음부터 없는데 말이지요. 도(道)가 그렇다고 하잖아요. 대낮에 버젓이 드러난 뻥 뚫린 길인데 오욕칠정에 찌든 사람들이 오히려 못 알아본다고요. 그 길에 아예 문마저 없다면 막힘은 있을 수도 없겠지요.
얼마 전에 ‘무문관 無門關’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봤어요. 무문관은 경주시 감포읍의 한 절에서 11명의 스님들이 2평 남짓한 독방에서 3년 간 수행 정진하는 내용이에요. 바깥에서 자물쇠로 잠긴 선방에서 하루 한 끼 주어지는 음식만 먹고 사람과의 만남이나 대화도 일절 없이 수행을 이어가요. 죽음마저 불사할 각오가 없이는 불가능하겠더라고요. 그 좁은 공간에 하루만 있어도 답답하기 그지없을 것 같은데 바로 그 자리가 대도로 이어진다니. 참 아이러니하지요.
오감을 자극하는 예술과 거의 모든 감각을 차단한 무문관. 너무 간극이 크지요? 하지만 서로 통하는 게 있어요. 들어보세요. 무문관의 먹먹한 감동 때문에 명상을 다시 진지하게 시작했거든요(이번에는 또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평소에도 바디스캔 같은 말랑한 명상은 꾸준히 하고 있었지만 단지 몸과 마음을 쉬게 하려는 목적이 컸어요. 주로는 낮잠용 나래이션으로 썼고요. 근데 가슴으로 밀려드는 무문관의 훈풍이 물렁했던 정신을 일깨우더라고요. 먹고사는 문제로 가슴에 묻어둔 것을 다시 접촉하게 됐어요. 무엇이 정말 나로 살게 하는가. 가장 나다울 때 나는 무엇을 하는가. 이 질문이 다시 살아서 저를 괴롭히더라고요. 질문은 스스로 답했어요. 막힌 곳에 있지 말고 뚫린 길로 오라고. 여기에는 문조차 없어서 경계라는 것이 없다고. 너 그리도 그리고 그리던 것이 그것 아니냐고. 잠든 가슴으로 사는 척하지 말고 진정 삶으로 깨어나라고. 삶을 살리고 삶을 살라고.
이 마지막 문장에 ‘아름답게’를 붙이면 그게 나의 예술일 거 같아요. 나의 삶이 아름답기를 바랍니다. 이 아름다움이란 속칭 아름다워서 아름다운 게 아니라 자연스러워서 아름다운 거예요. 나 자신으로 가장 자연스럽게 있는 일, 그게 명상이에요. 나 자신으로 아름답게 있는 일, 그게 예술이에요. 자연스럽게 숨만 쉬어도 아름답다면 그건 얼마나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일까요. 그게 제가 명상으로 하려는 예술인 것 같아요. 내가 내 삶을 살리는 방식인 것이지요. 달리 뭐 꾸며내려고 애쓰지 않고 매순간 아름다운 숨을 쉬는 방식이요.
뭐가 나로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게 하냐고 물으셨는데 이런 밍밍한 답을 내놓고 말았네요 하하. 그래도 이게 자연스러운 나인 걸 어떡해요.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아름답답니다. 가슴 깊이 있는 변하지 않는 것을 꺼내서 나만의 언어로 솔직하게 전달하고 있으니까요. 예술에는 무엇보다 자기의 혼이 실려야 하지 않겠어요? 이 편지가 어느새 나의 예술이자 명상의 행위가 되고 말았네요. 아 고마워요. 선물님. 그저 내가 될 수 있는 이런 기회를 주어서.
이 정도면 선물님의 질문에 답이 되었을 거 같아요. 나 자신에게도 어느 정도 충실한 답이 된 것 같고요. 아직 미진한 부분은 삶이 나에게 계속 말해주겠지요. 우리가 건초 더미에서 바늘을 찾는 심정일지라도 나의 예술을 고수하며 내면에 귀 기울일 때, 내 가슴이 말하는 걸 조금이라도 삶에 녹여낼 때, 아름다움은 끝이 없으리라 믿어요. 그래서 말인데요. 선물님은 언제 자기가 아름답다고 느끼나요? 혹은 최근에 세상이 아름답다고 느낀 경험이 있다면 그것도 듣고 싶네요.
2024.05.06~08. 대전에서 상담사 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