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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물작가 윤 Oct 03. 2024

중독과 양육

선물작가의 다섯 번째 편지

강원도의 산은 수묵화 같습니다. 산이 높다기보다 깊고, 첩첩산중이라 거리감으로 인해 수묵화같아요. 그러다 봄이 오면 점점 수묵채색화가 됩니다. 동강이 녹아 오리가 여기저기 떠다니고, 옅은 갈색으로 죽어있던 수풀 사이로 언뜻 초록빛이 보일랑말랑.

월요일마다 보내기로 약속해두고, 쓸랑말랑하다가 화요일입니다. 왜인지 수요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수요일 오전엔 ‘영달’이라는 그룹 모임이 있습니다. 올해부터 시작했는데 사진가, 미술가, 저. 이렇게 셋이 개인의 영달로 사진작가, 미술작가, 소설가가 되려고 함께 모여요. 가끔 영상, 편집디자인, 그림책에 관심 있는 분까지 여섯이 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주로 셋이 모여요.

저희 셋의 공통점은 좋게 말하면 욕심이 없고, 남 좋은 일하는데 관심이 많았어요. 과거형으로 끝맺은 건, 이제 각자의 영달도 좀 추구하자는 뜻에서 모였으니 나 좋은 일에 관심이 더 많아야 해서요. 하지만 여전히 셋은 남 좋은 일하는데 관심이 많습니다. 천성이 그런 건지, 각자의 페르소나인지, 환경인지, 삶의 지향이 그런 건지 각자에게 물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어요. 아마 여러 복합적인 것들이 섞여 ‘타인’지향적인 삶을 살고 있겠지요. 


어떤 이유에서 그렇게 살든,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사람이 똑똑하고 잘 나가는 세상에서 타인지향적인 사람들과 일주일에 한 번씩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건 참 행운인 것 같아요. 물론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도 출세 좀 해 보자! 하면서 모인 거긴 하지만요. 서로 밥값을 내는데 거리낌 없고, 혼자가 아니라 함께 뭘 도모하려고 하고, 어디서 또 남 좋은 일만 하고 오면  출세하자고 했잖아! 하고 나무라면서도 고개를 끄덕입니다.

“아마 나도 그랬을 거야.”라고 수긍하면서요.


나무님과도 결이 비슷한 생각을 가진 면이 있어서 수요일이라고 생각한 건 아닐까? 싶어요. 수요일 저녁마다 줌으로 만나는 그룹은 아예 작정하고 세상을 위해, 사람들을 위해 좋은 일 좀 해 보자! 라고 모이는 사람들이거든요. 제가 먼저 정한 게 아닌데 다 수요일이네요. 오전 10시, 저녁 8시. 아마 그 사이 어디쯤에서 나무님과의 편지를 떠올린 것 같아요.


지금의 저를 떠올리면, 차가운 봄비를 맞으며 ‘사는 게 뭐 그런 거지. XX’이라고 할 것 같다고 하셨죠. 아니랍니다. 고백하자면, 마흔이 넘어서도 가끔 차가운 봄비, 흠뻑 젖는 여름 장마철 장대비, 보슬거리는 가을비까지 여전히 종종 맞으러 나갑니다. 그때처럼 학교 안에 갇혀 있어야 하는 게 아니니 대부분 사람들이 잘 보이지 않는 밤에 나가요. 서울, 경기에 살 때는 밤에 나가도 가로등도 환하고, 산성비라며 다들 우산을 쓰니 여전히 미친 사람처럼 눈총을 받았어요. 강원도 고성, 영월, 논산에서는 가로등이 많지 않다 보니 어둠에 온전히 숨을 수 있어요.

밤에 묻혀 비와 나무와 제 자신과 이야기를 나누곤 합니다. 저는 아마 어떻게든 미친 채로 살고 싶은 모양이에요. 그러다 보니 빗방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보다 제가 말하는 목소리가 더 큰 것 같아요.


왜 아직도 전, 사는 게 그런 거라고, 페르소나는 당연한 거라고 받아들이지 못할까요?

진실되게 살고 싶다고 페르소나가 고통스러울 필요는 없는데, 삶의 흐름을 자연스레 따라간다고 잘못 사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발버둥 치며 특별해지고 싶은 걸까요?


사실 무엇에 중독되어 있냐고 물었을 때, ‘착함’에 중독되어 있다고 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바로 답장을 쓰려다 마지막 문장이 걸렸어요. 자기도 모르게 중독되어 있는 것.

그렇다면 계속 모른 채로 누군가 ‘중독’이라고 말해주거나 제가 다시 곱씹어 생각해서 발견해야하는 거잖아요. 못 찾겠더라고요. 새로운 중독을….


전 제가 무엇이 문제인지 잘 알아채는 편이에요. 그걸 고치는 게 어렵죠. 정확히 표현하면, 고치는 걸 미뤄요. 아직 위기감이 부족한 걸까요? 아니면 그걸 고치면, 그건 나인가? 하는 고민 때문일까요?

그냥 착한 사람, 좋은 사람, 선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나쁜 사람, 나쁜 사람, 나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요.

착한, 좋은, 선함의 반대가 ‘나쁜’으로 밖에 표현할 수 없다니!

그렇다고 악한과 착하지 않은 것을 반의어라고 보기에 좀 애매해요. 선하지 않다고 악한 건 아니고, 착하지 않다고 나쁜 건 아니잖아요.

하지만, 덜 착한, 덜 좋은, 덜 선한 사람이 되려니 죄책감이 들어요. 이왕이면 조금 더 착하고 좋은 사람이 좋잖아요.

사람들과 관계할 때도, 세상을 사는 의미를 느낄 때도, 제가 좋아하는 글을 쓸 때도 말이에요.


아까 제가 발버둥치며 살 정도로 특별하고 싶다고 했었죠? 그런 바람이 있는 저와 타인지향적인 저는 자주 충돌해요. 마더 데레사처럼 특별하게 타인지향적으로 살기엔 제 안에 너무 많은 제가 있어요. 그렇다고 덜 좋은 사람이 되는 건 죄책감으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해요.

한 달 전쯤 동화를 쓰고 기획하는 친한 동생에게 물었어요. 


“나 이렇게 누굴 미워하는 생각하는 것도 나쁜 거지?”

“…휴. 잘 들어. 누나가 생각하기에 이건 좀 이기적인가? 란 생각이 들 정도면, 괜찮아. 그냥 해. 전혀 이기적이지 않아. 이거 다른 사람에게 피해 주겠는데? 아냐. 전혀 안 그래. 이거 사회적으로 문제 되는 거 아냐? 안 돼. 절대 문제 안 돼. 법적으로 안 될 것 같은데? 그런 생각 정도 들면, 변호사 친구에게 물어봐. 아마 아닐 거야. 와, 이건 인간이 할 짓이 아니다! 그래, 그 정도면 보통이야. 제발 보통만큼만 살아라!”

“아냐, 나 요즘 엄청 나쁘게 살아. 막 뒷담화도 하고, 짜증도 내고.”

그랬더니 짜증 나게 하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그냥 짜증 내고 뒷담화도 하고 그러랍니다. 이미 해서 후회된다고 중얼거렸더니 ‘그래서 등단 못 하는 거야, 이 가시내야. 인간답게 살아.’라고 핀잔하더군요.


소설책이 나오면 작가의 말 첫 줄엔 이렇게 쓸 겁니다. 없는 얘기를 그럴싸하게 해서 독자에게 들려주어야 하는 소설을 쓰겠다면서, 거짓말을 못했던 인간. 그러면서 ‘사실’은 소설이 아니라며 자전적 소설은 쓰기 거부하던 인간. 거짓말도, 사실도 쓰지 못하던 인간이 쓴 소설.


그 어느 쪽으로도 가지 못하는 저는 착한 사람이 되려 무던히 애쓰지만, 기쁨보다 죄책감이 많습니다. 베스트셀러 소설가가 되려 벌써 십 년이 되도록 키보드를 두드리지만, 남들 보여주기 겁나는 출력된 종이만 색이 바래갑니다.


어쩌면 저는 지금 이 순간을 살지 못하고, 무언가 ‘되는 것’에 중독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게 중요하고, 그렇게 산다고 지난 편지에 거짓말을 했네요. 이렇게 엉망이 된 건 제가 무엇도 놓치고 싶지 않은 욕심쟁이라서입니다.

조금쯤 이기적으로 내 글 쓰는 시간을 먼저 챙기기보다 타인의 부탁을 들어주는 게 먼저고, 후회하면서도 착한 사람이 되는 것에 중독된 탓입니다. 그럼에도 중독에서 벗어나면, 그건 제가 아닐까 겁이 납니다.

등단은 멀어져가고, 타인을 위해, 타인에 의해 할 일은 쌓여가는데, 중독에서 벗어나는 걸 미루니 늘 제자리입니다.


그러면서도 최근 십 주된 라브라도 리트리버를 삼 주째 종종 돌보고 있습니다. 정말 예쁘다가도 뒤치다꺼리하고 키우는데 힘들기도 합니다. 역시 혼자가 좋아, 하면서도 외로움에 젖은 날엔 또 냉큼 돌보러 갑니다. 동물도 이런데, 사람은 오죽할까요? 아주 어린 아이들을 키우는 ‘아빠’ 두 명과 오늘 점심을 먹었습니다. 아빠인 나무님은 어떤가요? 외롭고 싶은 날도 있고, 아이들이 예쁜 날도 있겠죠?     


2023. 3. 7. 23:12 영월에서 선물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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