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의 네 번째 편지
편지를 받은 즈음 겨울이 마지막으로 자기 존재를 뽐내려는 듯 날씨가 추워졌어요. 요 며칠 정말 따듯한 봄바람이 분다고 좋아했는데. 당장의 추위는 선물 님의 편지에 함께 실려 온 걸까요? 아니면 내 안에 있는 겨울이 아직 봄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걸까요?
봄이 와도 봄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마음. 사람이 정말 우울할 때는 햇빛도 보기 싫지요. 찬란한 햇빛이 내 안의 어둠을 더욱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 같아서요. 어둠 속에 있으면 어둠은 보이지 않으니까요. 보이지 않는 것은 안심되지요. 스스로 아무것도 못 보게, 아무것도 모르게, 아무것도 두렵지 않게. 햇빛을 거부하고 어둠 속으로 파고들면서 우리는 어둠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도 깜깜해져요. 어둠은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없잖아요. 햇빛이 들지 않는 게 어둠이지 어둠 자체가 햇빛을 가릴 수는 없잖아요.
선물 님이 물으셨죠. 지금 쓰고 있는 가면이 있냐고요? 내 안에서 자꾸 어둠을 발견하고 이상하게 포근한 어둠의 이불에 폭 감싸여 있으려고 할 때 그것이 가면이라고 생각이 들었어요. 있지도 않은 어둠으로 얼굴을 가리고 세상에서 나를 숨기려 하는 가면. 내면의 빛이 외부의 빛과 만나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가면. 사실은 어둠조차 빛의 흔적인데 애써 빛이 존재하지 않는 듯 굴 때 나는 가면을 쓰고 있는 거예요. 두려움의 노예가 되어 세상에 대해 희희 거리며 냉소적으로 굴거나 무엇을 해도 어차피 잘 될 수 없고 해봐야 소용없다고 할 때 가면을 쓴 어둠의 거짓 증언자가 돼요.
처음에 선물 님의 ‘가면’ 질문을 받았을 때는 곧바로 페르소나 이야기가 떠올랐어요. 이제는 BTS가 노래로 부르면서 범국민적으로 알게 된 ‘페르소나’. 페르소나는 사회적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쓰는 가면이잖아요. 연극 무대에 오른 배우처럼 진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 그 역할을 수행하는 것. 사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살고 있지요. 집단 사회를 이루며 살 때 자기 본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는 없으니까요. 집에서 하듯 고데기로 머리 말고 파자마 입은 채 대접에 담긴 비빔밥을 퍼먹는 모습을 회사에서도 그대로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그런데 페르소나가 무엇인가요? 이 페르소나는 그 두려운 나날 속에서 나를 먹여 살린 존재 아닌가요? 두려움에 갇혀 살아온 날들을 떠올리면 이 페르소나가 썩 마음에 들지 않지 않기도 하지만 반대로 나를 두려울 만한 모든 일에서 구제해 준 친구예요. 항구에 묶인 배처럼 살아온 것이 무척 아쉽기도 하지만 덕분에 큰 풍랑을 만날 일도 없었어요. 나를 두려움에 봉인한 듯하지만 어쩌면 그게 그때 할 수 있는 최선이지 않았을까 싶어요. 페르소나에게는 페르소나만의 운명이 있었겠지요. 그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페르소나에게 너무 가혹하게 굴고 싶지 않아요. 지금까지 못살게 굴었으면 됐죠. 앞으로는 이 페르소나와도 친구처럼 다정하게 지내고 싶답니다.
선물 님, 아직 차가운 봄비에 교복이 젖도록 혼자 교정을 걸었다고요? 갓 입학한 중학교 1학년이 꽤나 삶에 대해 심각했네요. 지금의 선물 님이라면 조금 다르게 하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사는 게 뭐 그런 거지. XX.’부터 내뱉지 않았을까요? 뭐 어쨌든 ‘비를 맞으며 하염없이 걷고 있는 미친 중학생’을 떠올리자마자 피식 웃고 말았어요. 왜 우리는 이렇게 엉뚱한 장면에서 비슷한 거죠? 그래서 서로 통하는 면이 있는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저도 꼭 그렇게 한 적이 있었거든요.
저도 그때 중학생이었을 거예요. 다른 가족들과 여행을 가는 날이었어요. 한곳에 차로 집결한 뒤에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고 뭔가 확인한 뒤 각자 자기 집 차에 올라탔지요. 저도 우리 집 차 뒷좌석에 앉아 차창 밖으로 비 오는 걸 바라보고 있었어요. 비가 많이 쏟아지지는 않았고요. 약간 부슬비처럼 내렸던 것 같아요. 근데 갑자기 어떤 충동이 일어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어요. 저 비를 맞아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달까요? 다른 가족들도 다 보는 가운데 그 주차된 차들 사이에서 비를 맞으며 잠깐 서성였어요. 스스로도 이상하다고 생각했고 이상해 보일 것도 알았는데 그냥 그랬어요.
지금도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어요. 다만 그 시절 저도 삶에 대해 꽤나 심각했다는 건 알아요. 뿌연 안개에 쌓인 듯 삶이 명확하게 잡히지 않는 느낌으로 살았어요. 내 인생의 무대에 내가 주인공이 아닌 듯한 느낌. 객석에 앉아서 내 인생을 관람하고 있는 듯한 느낌. 저것이 분명 내 것인데, 내 것이어야 하는데 완전히 내 것은 아닌 것 같은 느낌. 무대에 있어야 할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나는 객석에 있어야 할 것 같은 느낌. 보이지만 만지는 것은 금지되었다고 무언의 경고 메시지를 받은 듯. 멀리서 얼마든지 봐도 좋으나 다가가서는 안 된다는 특별 허가를 받은 것도 같았어요. 어떤 알 수 없는 힘이 ‘가질 수 없는 나’를 다만 구경하라는 듯 주술을 건 게 아닌가 싶기도 했고요. 무대 위의 인생과 객석에 앉은 나 사이에는 비닐 막 같은 경계가 있는 것 같기도 했어요. 도수가 꼭 맞는 안경처럼 삶의 장면을 선명하게 보여주면서도 결코 삶에 가 닿을 수 없게 만드는 투명한 막.
그래서 정처 없이 비를 맞은 게 아닐까요? 하늘과, 그러니까 운명과 직접 접촉하고 싶어서요. 두루뭉술하게 삶이라는 위장막으로 나에게 다가오지 말고 직접 그 언어로 내게 말을 걸라고요. 내리는 비를 맞으며 알 수 없는 삶의 답을 몸으로 읽고 싶었나 봐요. 빗방울 하나하나가 내 몸의 세포 하나하나에 닿을 때 정말로 알 수 있지 않을까, 정말로 해갈되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나도 모르게 했던 게 아닌가 생각해 보아요. 선물 님은 어때요? 저는 그때 부모님과 다른 가족 눈치를 봐서 그저 잠깐 서성였을 뿐이거든요. 선물 님은 미치도록 빗속을 걸었으니 저보다 더 잘 알 거라 생각해요. 선물 님이 맞은 빗방울은 선물 님께 뭐라고 하던가요?
그 시절의 그 청승은 나의 본모습이 아니라 나의 가면이라고 생각해요. 그게 나의 진면목이라면 좀 슬프잖아요. 이제 나이도 어지간히 먹고 청승은 부릴 만큼 부려봤으니 알 것 같아요. 나는 청승 중독자였구나. 무슨 사연이었는지는 다 파헤칠 수 없지만 그렇게 변장한 채 살아왔어요. 저기 보이는 ‘내’가 정말 ‘나’일까 봐 구경만 하려 했구나. 그게 두려워서 어둠으로 치장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듯 스스로 삶을 가로막고 있었구나. 삶의 모든 위험을 피하기 위해 청승 떨고 실눈 뜨고 살았구나. 그 눈을 하고는 무진장한 내 삶의 보물들, 내면의 보석들을 결코 캐낼 수 없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나이가 들고 세상에 닳다 보니 한 가지 좋은 점이 있어요. 이제는 두려움보다도 위기감이 앞서요. 이대로 살다가는 정말 이대로 죽겠다는 위기감. 청승 중독자로 살다가 내 인생을 제대로 맛보지도 못하고 죽을 수 있다는 위기감이 내면에서 올라와요.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청승 떨던 가련한 청춘이여. 이제 그만 그 가면을 벗자. 변장은 그만두고 내 삶을 직접 만지자.’
청승 중독자에게 삶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싶어서 나 자신에게 이렇게 말해요.
인생의 전반전은 너의 가면으로 살 만큼 살았으니 후반전은 나의 본모습을 보여줄게. 그동안 네가 나를 먹여 살린 건 고맙지만 이제 내가 너에게 진짜 삶이 무엇인지 보여줄게. 청승 중독에서 깨어난 세상이 어떤지 함께 보지 않을래? 눈 감으면 어둠, 눈을 뜨면 빛이 보여. 오랜 중독에서 깨어나렴.
선물 님은 무엇에 중독되어 사나요? 혹시 자기도 모르게 중독되어 있는 게 있나요?
2023. 2. 26. 09:31 대전에서 상담사 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