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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물작가 윤 Oct 03. 2024

돌직구 상담과 양육

나무의 여섯 번째 편지

희한하게도 오늘도 꽤나 추워요. 

선물님의 편지는 추위를 달고 다니는 걸까요? 아니면 제가 추울 때면 더 답장을 하고 싶어지는 걸까요? ‘선물’님이니 설마하거니 추위를 선물로 보내지는 않았을 테지요. 아마도 추운 제 마음을 따듯하게 데우고 싶어서 추울 때마다 답장을 쓰나 봐요. 


엊그제 비가 내렸고 꽃샘추위가 찾아왔어요. 봄이 오려다 말고 겨울이 온 것 같아 패딩을 다시 꺼내 입었어요. 왠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라는 요기 베라의 명언이 떠오르면서 다시 찾아온 차가운 날씨에 정신을 세우며 외려 희망의 칼날을 갈아요. 그 칼을 높이 세우고 앞장서며 소리쳐 봅니다. 어서 오거라 봄아! 너의 심장을 내놓아라! 


고백하건데 선물님의 이번 편지를 읽으면서 선물님에게 심장을 강요하고 싶었어요. 저의 이기적인 욕심으로 인해 선물님을 상담실에 반강제로 앉히고 싶은 충동이 들었답니다. 

먼저 선물님이 자리에 앉으면 상담을 빙자해 취조를 시작할 거예요. 

“대체 그래 가지고서야 선물이 되겠습니까? 지금처럼 해서는 도무지 선물이 될 가망이 안 보이는 것 같은데요. 세상을 위해, 사람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하겠다니 대체 무슨 소립니까? 착함에 중독되어 있다면서요? 정말 착함에 중독되어 있으면 자기한테도 착할 줄 알아야지요. 어떤 사람들은 남에게만 착한 사람을 아주 싫어해요. 부담스럽잖아요. 선물님은 남에게 부담이라는 선물을 주고 싶습니까? 남에게 빚진 느낌을 선물하고 싶나요? 상대방이 어떤 마음이 들지, 얼마나 묘하게 짜증이 나고 답답할지 생각해보았습니까?”  

음. 너무 조목조목 따갑게 집었나요. 선물님을 덜 타인 지향적으로 살게 하기 위해 살갑게 고문을 하는 장면을 떠올려 보았어요. 이 정도로는 미동도 안 하실 수도 있겠지만. 끝내 그렇다면 ‘그 착한 심장 이리 내!’라고 덧붙일 거예요. 

이렇게 얘기한다고 이쯤에서 편지가 끊기진 않겠지요? 상담실 고문 운운하는 것은 우리의 우정이 그보다는 훨씬 깊을 거라는 믿음 때문임을 믿어주길 바래요. (‘바래요’라고 쓰면 선물님이 ‘바라요’가 문법에 맞는다고 착하게 교정해 줄 것 같지만 아나운서조차 그렇게 안 쓴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고 미리 항변을 합니다!) 


편지 뒷부분에 무언가 ‘되는 것’에 중독이 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하셨네요. 그건 저랑은 약간 다르면서도 비슷하네요. 굳이 따지면 저는 ‘되는 것’이 아니라 지난 편지에서도 썼듯이 ‘되지 않는 것’에 중독이 되어 있는 것 같아요. 아무것도 안 되겠다는 심산이지요. 그러면서도 선물님과 결국 같은 지점에 봉착해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무언가가 ‘되는 게’ 두려워서 맨날 ‘가능성’만 품고 ‘모든 꿈’을 바라보며 ‘지금 이 순간을 사는’ 척 하는 것. 이게 무슨 멍멍이 소리인가요. 간단히 말해서 결국 앞으로 나아가지 않겠다는 소리인 걸. 


이제 우리 스스로를 속이는 짓은 그만하기로 해요. 뭐 강요할 수는 없는 거니까, 저는 좀 더 땅을 딛고 살려고 해요. 숱하게 들었던 피드백이거든요. 어딘지 인도 스타일, 신선 갬성이라고. ‘당신 취향이 좋긴 좋은데 완전히 정말 좋다고는 할 수 없다.’라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어요. 좋게 이야기해준 거지만 결국 현실 감각이 떨어진다는 소리지요. 

‘아무것도 놓치지 않겠다는 소리는 아무것도 안 되겠다는 말이야.’ 저한테 하는 이야기입니다. 선물님이야 저보다는 훨씬 현실적이고 구체적으로 사니까요. 오죽하면 선물님한테 제 글을 보여줬을 때마다 ‘구체적인 상황 묘사‘를 첨가하면 좋겠다고 피드백 들었을 정도니까요. 이렇게 보면 이쪽으로는 저의 의문의 1승이지요. 하하. 이걸 좋아해야 하는 것인지도 의문, 그래서 의문의 1승 더 추가. 


선물님은 착함을 버리면 마치 자기가 사라지기라도 할 것 같이 말했는데 착함이든 뭐든 중독되어 있다면 그건 이미 선물님이 아닌 게 아닐까요? 중독은 중독자와 중독 대상이 따로 있어야 하니까요. 꼭 뭐에 중독되어 있어야 사람인 건 아니잖아요. 중독되기 전에 선물님은 어디 갔나요? 설마하니 착하게 타고났다고는 하지 않겠지요? 그건 어쩐지 착한 발언은 아니니까요. 저는 그 종류가 무엇이든 중독이 없는 세상에 살고 싶어요. 맑은 정신으로 사는 사람이 많은 아름다운 세상에 살고 싶어요. 제 부탁을 선물님답게 ‘착하게’ 들어줄 수는 없을까요? 한 번 쯤은 착하지 않는 자기 자신을, 착한 척하느라 자기에게 착하지 않는 자기 자신을 믿어봅시다요 좀. 

이쯤에서 친절한 상담은 그만둘게요. 너무 말이 많았네요. 사실 이번 편지는 일장 훈계형 상담으로 끝내고 싶긴 해요. 하지만 저도 살짝 착한 척 좀 해봅니다. 갑자기 그 동화를 쓰고 기획한다는 친한 동생의 심정이 마구 이해가 되네요. ‘이 가시내야.’라고 할 수는 없으니 ‘이 아가씨야.’라고 착하게 상담을 마무리합니다. 


이제 질문에 답해야겠네요. 아빠인 제가 어떠냐고 물으셨지요. 세상에 벌써부터 그렇게 어려운 질문을 하면 어떡하나요. 이 지면을 어떻게 때울지 참 난감해요. ‘어쩌다 어른’이라는 TV 프로그램이 있지요. 그 프로그램 제목을 보고 참 잘 지었다고 생각했었어요. 많은 사람들이 제목만 듣고도 공감했을 거예요. 선물님도 저도 우리 모두 엉겁결에 어쩌다 어른이 됐잖아요. 그냥 살다보니 어느 순간 남들이 ‘너도 이제 어른이니까’라고 하는 말을 듣기 시작했지요. 아빠라는 것도 별반 다르지 않아요. 어른 되는 법을 배우고 어른이 된 게 아니듯이 아빠 되는 법을 배운 적도 없는데 아빠가 되었지요. 어쩌다 아빠가 되어 아직 아빠가 어떤 사람인지 탐구하며 살고 있어요. 오히려 선물님께 묻고 싶어요. ‘아빠들’이 어떤 사람으로 보이나요? 


요새 이 아빠는 아이들에 대해 예전보다 자주 생각해요. 생각보다 빨리 크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서 세월이 참 빠르다는 걸 느껴요. 그만큼 내가 빠르게 나이를 먹고 늙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돼요. 무감각했던 시간 감각, 생의 감각에 분명하게 깨어 있게 하는 아이들. 말하자면 아이들은 저에게 각성제입니다. 국민 자양강장제 박XX보다도 때로는 더 극적인 효과를 주는 각성제. 예전에 한 금연 관련된 강의에서 강사가 이렇게 말했어요. 자기가 담배를 끊은 방법은 자기 아이들을 생각하는 거였다고. 너무 담배를 피우고 싶을 때는 아이들이 이렇게 나처럼 살길 원하는지 생각해 보았대요. 그러면 담배를 집었다가도 내려놓게 됐다고. 그때는 잘 몰랐는데 하루가 다르게 커 가는 아이들을 보면서 그 강사의 말이 정말 맞는다는 걸 느껴요. 그러니까 아이들이라는 존재는 저에게 큰 기쁨이자 선물임과 동시에 절간 큰 스님의 장군죽비와도 같아요. 정신 차리고 일어나라, 이 아빠야! 


편지에 ‘양육’이라는 거창한 화두를 붙여서 주셨는데 저는 아이를 양육하고 있지 않답니다. 어쩌다 양육, 당하고 있어요. 양육이 뭔가요. 기르고 기른다는 뜻이잖아요. 이 단어에는 사실 아빠와 아이, 양육자와 피양육자의 구도도 전혀 없어요. 우리는 모두 지구별 여행자로 살아가면서 서로 기르고 길러지는 중이지요. 선물님과 저도 이 편지를 통해 서로를 기르고 있는 게 아닐까요? 서로에게 양분이 되어주는 선물 같은 존재, 나무 같은 존재. 캬. 쓰고 보니 어쩜 이렇게 딱 맞는 별명을 지은 것인지, 아름답네요. 


아빠인 나무는 아이들과 함께 오늘도 신나게 지구별을 탐험하려고 합니다. 그러니 저에게 전통적인 양육에 대해서 묻지 말아요. 아 그리고 마지막 질문에는 답을 안 했네요. 짧게 답할게요. 외롭고 싶은 날은 별로 없어요. 왜냐하면 이미 외로우니까요! 산다는 건 그런 것, 인간은 누구나 마음 깊은 곳에 외로운 구석 하나는 가지고 살잖아요. 그걸 너무 잘 너무 자주 느끼고 살았던 이 아빠는 이제 외롭기보다는 좀 더 잘 어울리며 (적당히 외롭게) 살고 싶네요. 천성이 이미 외로움 쪽으로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그동안 외로움과는 충분히 사귀어 봐서 이제는 다른 친구들과도 어울리고 싶어요.


선물님의 질문은 사실 제가 선물님께 하고 싶은 질문이에요. 그 질문 그대로 돌려드릴게요. 어떤 때 좀 더 외롭고 싶나요? 또 어떤 날 세상과 더 어울리고 싶나요? 


2023. 3. 14. 15:04 대전에서 상담사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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