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소를 뗄 판에 샤넬?

선물작가의 일곱 번째 편지

by 선물작가 윤

아마도 내일이면 나무님의 편지를 받아보겠지만, 이렇게 먼저 쓰는 걸 이해해주세요.

평소라면 이런저런 메모를 끄적거린 노트를 고이 넣어두겠죠. 소설로 무르익을 때까지 말이에요. 그렇게 담가둔 메모가 얼마나 될까요?

처음 선생을 그만두고 들었던 소설 수업은 문학과 지성사에서 하는 정용준의 소설 수업이었어요. 몇 편이나 썼냐고 묻더라고요. 딱 십 년 전 이맘 때 즈음일 거예요. 아니면 이보다 한 달 뒤.

“두 편이요. 하나는 학부 때 과제로 썼었고, 하나는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쓴 건데 수없이 퇴고하느라 퇴고 횟수를 셀 수 없어요. 그러느라 두 편이에요. 아, 그리고 또 몇십에 가까운 시작하지 못한 노트, 주제가 있어요.”

“소설이 되지 못한 쓰다 말 거나 쓰고 버린 단편이 저는 몇백 개가 폴더에 있어요. 하지만 그건 소설이 아니에요.”

꽤 따뜻한 작가라 약간의 유머가 섞인 말투였어요. 하지만 꽤나 충격이었어요. 저는 그 노트와 주제가 다 소설이 될 줄 알았거든요.

저도 이제 소설이 아닌 노트가 백 단위를 넘었고, 지난 이 년은 이런저런 일로 메모도 하지 못해 이젠 무슨 메모가 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아요.

그래서일까요? 무작정 오늘은 먼저 오랜만에 낮 동안 쓴 메모를 글로 옮기고 싶었어요.


샤넬.

막 삼십 대가 된 친구가 결혼하면서 샤넬 백을 남자친구일 때 선물 받아냈다고 자랑했었어요. 결혼 생활하면서 받긴 힘들 테니 결혼 전에 받아야 한다고요. 스마트폰 하나와 립스틱 정도 들어갈 것 같은 작은 가방이 이백만 원이라고 했어요. 샤넬 로고가 박힌 검정 클러치 백이었는데, 사실 그걸 클러치 백이라고 부르는 게 맞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다른 친구들이 부러워서 그 가방을 보는데, 전 별로 부럽지 않았어요. 명품에 대한 로망이 없다고나 할까요?

어쩌면, 그때의 저는 부러운 마음마저 감추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죠.

십 년이 지난 지금도 제겐 명품이랄 게 없어요. 아빠가 제자에게 선물 받으셨던 버버리 목도리를 제게 주셨었는데, 앰뷸런스에 실려가면서 잃어버렸어요. 아빠도, 나도, 우리 가족은 명품에 대한 인식이 없어서 속상해하지도 않았어요. 아니면 버버리보다 쓰러진 제가 소중했던 걸 수도 있고요. 삶에서 명품 같은 겉치레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언감생심, 바라지 않는 걸 수도 있어요.


재작년 생일에 샤넬 넘버 5 헤어 미스트를 선물 받았어요. 아빠가 해외여행에서 사 주셨던 SK2, 이전 남자친구가 사줬던 랑콤 크림, 그리고 세 번째로 백화점 일 층에서 파는 걸 선물 받아본 거였어요.

샤넬 넘버 5는 이름만으로도 워낙 유명하잖아요. 전 뚜껑을 열지 않았어요. 뭐랄까, 저에게 어울리지 않는달까. 너무 고급스러워서 나이 마흔이 넘어서야 스킨을 바르기 시작한 저에게 사치라고 느껴졌어요.

그래서 선물과 함께 온 샤넬 팝업 스토어 열리는 조향 마스터 클래스 초대장을 보고도 망설였어요. 가서 뭔지 몰라 두리번거리며 쫄까봐서요.


하지만, 평생 다시 없을지 모른단 호기심에 북촌 휘겸재에서 열린 조향 마스터 클래스에 참여했어요. 아침 7시 반에 일어나 영월역에서 청량리역으로 간 후, 서울성모병원에서 산부인과 정기 검진을 받고, 오른쪽 난소를 수술해서 제거해야 할 수도 있지만 좀 더 지켜보자는 말을 듣고, 가방에 넣어 온 도넛 하나와 텀블러에 담아온 커피를 고속터미널 맞은편 도로에서 점심으로 먹고, 1,350원을 아끼려, 혹은 운동하려, 걸어서 신논현역 근처에 갔어요.

교보문고에서 치과 예약 시간까지 두 시간 정도를 보냈어요. 기차 타고 온 김에 병원을 다 가자고 생각했거든요. ‘부자가 되는 법’이 쌓여 있고, ‘창문을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은 2013년 이후 147쇄를 찍었고, 청소년 때 읽었던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는 15년에 열린책들로 판권이 넘어간 모양인데 그때부터도 34쇄를 더 찍었더라고요. 1쇄도 안 팔리는 책들이 수두룩한데 말이죠. 초등 영어 구역에 갔더니, 제가 중고등학교 때 배웠던 문법과 읽기 수준의 책들이 있더라고요. 와. 이제 나보다 젊은 사람들은 다들 영어를 엄청 유창하게 하겠네, 생각하며 성인용 영어 구역으로 갔어요. 근데, 방금 초등 구역에서 본 것과 비슷한 문법과 읽기가 있더라요.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런치, 왓? 꺄르르’. 하는 소리가 들리더라고요. 청소년인지, 이십대 초반인지 모르겠는 옅은 화장한 두 여학생이 ‘이래도 다 알아듣는데, 뭐.’ 하면서 서로 웃더라고요.

빈손으로 교보문고를 나와 2015년부터 시작해서 아직도 하는 턱 교정 치과에 들렀어요. 지난번 우편으로 보내준 교정 장치가 안 맞아서 새로 하는 거라 돈은 안 받으실 거죠, 하려는데 본을 뜨려 입에 분홍색 끈적한 걸 넣으며 치위생사가 말했어요.

“재료비 만오천 원은 받을게요.”

대답할 수 없었어요. 입에서 천천히 분홍색이 굳어갔거든요. 만오천 원. 참 애매하더라고요. 삼만 원이나 오만 원이었으면 접수대에서 다시 얘기할 텐데, 만오천 원. 사실 새 장치를 받고 작년 한 해 바빠서 거의 일 년 가까이 되어 간 거라 입이 떼어지지 않더라고요. 사용을 못 했다 하더라도 너무 오랜만에 간 거라서요. 만오천 원. 그래서 결제했어요.

치과를 나와 북촌까지 걸어갈까 했어요. 만오천 원을 썼으니까요. 아니, 이미 산부인과 초음파에 십만 원도 썼지. 기차비도 들었고요. 고민하다 버스를 탔어요. 지하철보다 오백 원이 싸더라고요.

조향 클래스는 세 시에 예약했었는데, 북촌에 도착했을 땐 이미 세 시를 훌쩍 넘겼어요. 다섯 시로 클래스를 옮기고, 두 시간을 보낼 카페를 찾다 관두었어요. 그리고 치과에서 텀블러에 받아온 뜨거운 물에 커피를 탔어요. 가방에 보통 카누 한두 개를 들고 다니거든요. 그리고 텀블러를 들고 북촌을 걸었어요. 월요일 오후는 한산해서 운치 있었어요.


다섯 시가 거의 다 되어 클래스에 가니 안내하는 아르바이트생들이 다들 180cm가 넘고, 잘생긴 데다 검정 수트를 입은 이십 대 젊은 남자들이었어요. ‘네, 혼자 왔어요’라고 대답할 때, 흰색에 검정 테두리를 두른 샤넬 종이가방을 사은품으로 받을 때, 나갈까 했어요.

백화점 일 층 냄새를 싫어하는 내게 그냥 집에 가자고 졸랐어요. 하지만 그들은 정말 친절하게 안내했어요. 너무 친절해서 몸둘 바를 모르겠더라고요. 클래스에서 화장 안 한 여자는 저 혼자였어요. 사십 대에 책가방을 메고, 엠버니 먼지 향이니 하는 걸 못 맡는 것도 저 혼자, 아직 아이도 없고, 결혼도 안 했는데 난소를 떼어내야 할지도 모르는 여자도 나 혼자. 샤넬은 명품이 아니라 작품이구나, 사치품이 아니라 예술이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사이 키스를 받고 싶은 곳에 향수 한 방울, 이라고 한 샤넬의 말을 따르고 싶은 향을 맡았어요.


샤넬은 하얀 동백꽃을 제일 좋아했는데, 그 꽃은 향기가 없어 찾아 헤매다 치자꽃이 가장 적합한 향을 냈대요. 하지만 치자꽃잎이 너무 얇아 향 추출에 실패해 찾아낸 게 월화향, tuberose래요. 달빛 아래 흰 꽃에서 날 수 있는 가장 깊고 높고 은밀하고 치명적이게 달콤한데 빛나기까지하는 향을 상상해 보세요. 거기에 달빛 윤슬이 일렁이는 투명한 작은 샘물, 검정 수트를 입은 젊고 잘생기고 키가 크고 눈이 선한 남자, 혹은 여자. 그게 샤넬 향수에서도 최고급 등급인 Les Exclusifs de Chanel의 Gardenia향이에요. 200ml에 58만원, 75ml에 28만원. 국내에선 열세 곳에서만 파는 소량의 향.


저는 로또가 당첨되면, 이마트에서 장을 본 후에 택시를 타고 집에 오고 싶었어요. 물건 당 일이백 원 싸게 사려고 마트에 가는데, 차를 가져가거나 택시를 타면 집 근처 슈퍼에서 사는 거랑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니까 로또에 당첨되면 그런 사치를 해 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오늘 샤넬 팝업스토어에서 사고 싶었어요. Gardenia향. 견물생심. 마음이 생겨버린 거예요. 욕망일까요? 사치일까요? 샤넬일까요?


2023.3.13. 무궁화호를 타고 영월에 돌아오는 길에 선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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