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riya Dec 08. 2017

눈 오는 아침

 밤사이 세상은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남편이 이국적 분위기라며 세비뇽 거리라 이름 붙인 윗동네로 가는 길이 새하얗다. 머리 위에 한가득 눈을 이고 있는 나무들을 끼고 부드럽게 꺾여 올라가는 이 거리가 오늘따라 그 이름과 닮았다는 느낌이 든다. 모두들 잠든 사이에 흔적만 남기고 가버린 그녀 덕분에 동네 아이들이 살판이 났다.


 유수지로 만들어 놓은 빈터에 모처럼 아이들 소리가 요란하다. 평상시에 보이지도 않던 아이들이 어디에서 저렇게들 모였는지 저 출산으로 온 나라가 걱정이라더니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겠다 싶은 생각마저 든다.


  출근길이 걱정이라는 말을 하면서도 입가에 어린 미소는 어쩌지 못하는 걸 보면 식구들도 눈이 온 것이 좋은가 보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나무 위의 눈꽃들과 바람이 스칠 때마다 흩날리는 눈비가 어릴 때의 기억을 떠 올리게 하며 부질없이 나들이 갈 일을 궁리해 본다.


  어릴 때의 외가는 눈이 많이 내리는 고장에 있었다. 어느 날 아침 일어나 보니 눈이 내 키를 넘어 쌓여있었다. 부지런한 삼촌들은 벌써 앞마당과 이웃집으로 통하는 길가의 눈을 다 쳐내고 그 쌓인 눈으로 눈 집을 만들어 두었다. 엄마를 떨어져 있는 어린 조카가 안쓰럽기도 하거니와 그렇게 수북이 쌓인 눈을 보며 똑같이 어렸을 삼촌도 놀 거리가 필요했을 것이리라. 그 눈 집에서 옆집 숙이와 짚북데기를 깔아놓고 우리만의 방을 꾸미고 깔깔대던 기억이 난다. 봄이 찾아와 제자리를 요구할 때까지 그 흔하디 흔한 눈은 마당 한편에 언제나 자리하고 있었다.


  그렇게 눈이 오는 날이면 청년들은 집 안팎을 쳐내고 그 쌓인 눈으로 동생들이 놀 미끄럼틀도 만들어 주고 놀다가 잠시 몸을 녹일 움집도 만들어 주곤 했었다. 아침밥을 먹자마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하나 둘 아이들이 모여들어 한동안 눈사람을 만들고, 눈싸움을 하느라 온 동네가 북적인다. 그것도 시들해질 때쯤이면 형들이 만들어 놓은 얼음 미끄럼틀에 덩치가 큰 아이들이 올라가 꺼지지 않을 때까지 다지고 또 다져놓고 물을 살짝 부어놓는다. 그러면 추운 날씨에 꽁꽁 얼게 되고 얼음 미끄럼이 되는 것이다. 서너 개의 계단을 만들어 딛고 올라가야 하는 큰 미끄럼이기에 당연히 넓은 공간이 있는 곡식을 거둬 들이 빈 밭 이여야 했다. 그러면 그곳은 겨울 내내 동네 아이들의 즐거운 놀이터가 되고, 아지랑이가 온 들판에 피어오를 때까지도 얼음이 남아있는 곳이기도 했다.


  밤사이 내린 눈은 아직 더럽혀지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햇빛을 반사하여 반짝이 기조차 한다. 부르는 사람도 없건만 나도 모르게 발길은 아이들의 소리에 이끌려간다. 벌써들 가버렸는지 놀고 있는 아이들도 들리던 소리만큼 많지가 않다. 뛰어다니며 눈싸움을 하는 아이도, 함께 미끄럼을 타는 아이도 없다. 눈사람을 만들 모양인지 각자 눈을 뭉치고 있을 뿐이다. 그것도 힘을 합쳐 자기 몸만큼 큰 눈사람을 만들지도 않을 것 같다. 그저 조그마한 눈사람 가족이 만들어질 모양이다. 


 함께 하는 놀이는 이제 별 인기가 없는 듯하다. 하기야 그러한 큰 눈사람도, 큰 미끄럼도 만들어지려면 온 동네 아이가 모여도 한나절은 족히 걸리는 일이었는데 요즈음의 아이들이 어떻게 그 긴 시간을 낼 수가 있겠는가? 두뇌 발달에 좋다는 영재 학원도 가야 하고 운동하러 체육관에도 가야 하니 그저 눈을 만져보는 기쁨이나마 허락하는 부모에게 감사해야 할 판이다. 동생들을 위해 놀이거리를 만들어 주는 형들도, 함께 놀며 배우는 친구들도 없지만 눈이라는 선물이 모두에게 잠깐 동안의 기쁨이 되어준다면 함께 어울리며 배우는 인간의 존엄, 배려, 협동 이러한 것들을 다른 곳에서 배운 들 어떠하겠는가?


  지금은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눈이 그렇게 쌓일 정도로 오지도 않을뿐더러 도시의 눈이란 쌓이기가 무섭게 염화칼륨이 뿌려져 녹아버리고 길옆에 쌓인 눈조차 차들이 튀기고 간 시커먼 땟물을 뒤집어쓰고 있으니 눈에 대한 추억들이 요즘 아이들에겐 어떻게 기억될지 궁금하기 조차하다.


  눈을 뭉쳐, 놀고 있는 아이들에게 던지며 장난을 걸어 보았지만 이상한 아주머니 취급만 받고 발길을 돌렸다.

“아저씨 밤새 눈이 와서 세상이 참 예쁘죠?” “네 그렇긴 하지만 날씨가 추워서 이대로 얼어 버릴까 봐 빨리빨리 쓸어 내야 하는데 이렇게 계속해서 내리니 큰일이네요. 눈이야 아이들이나 좋아할 일이고 우리 같은 사람이야 주민들을 위해 해야 할 일이 더 생긴 것이지요.” 솔가지에서 흩어져 내리는 눈비를 맞으며 서 있자니 아파트 뜨락의 눈을 부지런히 쓸어내며 투덜거리는 경비아저씨의 모습이 정겹기 조차하다. 


아저씨의 말마따나 모두가 좋아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눈 하나로도 이렇게 세상은 아름다워지기도 하고 미소를 띠게도 하지 않는가? 어릴 때의 친구들과 동네 언니 오빠들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모르지만 그들의 가슴에도 그때의 추억이 생각 나 서로의 소식을 궁금해하는 따뜻하고 행복한 시간이 되리라.

  하얀 눈 위에 구두 발자국  /   바둑이와 같이 간 구두 발자국....     

흥얼거리는 내 노랫소리조차 정겹다. 아직도 나는 아이이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엄마의 딸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