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디게, 느리게 괜찮아지기 3
‘옳거나 그르거나’. 나의 생각 회로가 돌아가는 방식이다.
그래서 ‘그럴 수 있겠다.’라 생각하는 사람을 부러워한다. 그들이 생각하는 방식을 돈 주고 사고 싶을 정도다.
나의 뇌가 ‘정말 그럴 수 있나?’라는 의문을 품는 순간 내 마음은 ‘아니, 그럴 수 없어’라는 가혹한 답을 내리기 바쁘다.
나는 마음속 작은 법원을 세워 판사가 된다. 그리고 내 행동 하나하나를 분석하기 시작한다. 이 행동은 틀렸어, 이건 바람직하지 못해, 왜 그랬어. 자책하고 채찍질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논리적인 의심이 드는 순간이 찾아온다. 정말 잘못된 행동이었는지, 사회 규범에 어긋나는 행위였는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논리적으로 따져본 뒤 나에게 잘못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논리로는 충분히 스스로를 설득시킬 수 있지만 ‘나’라는 사람에게 공감의 손길을 내어주지는 못한다.
남에게는 그렇게 잘하는 ‘공감’, 나에게는 생소하고 어려운 일이다. 결국 공감을 얻고 싶어 혼자 끙끙 앓다가 친구들에게 털어놓는다. 그게 설령 나의 약점이 될지라도 말이다. 마음이 너무 힘들어 요동칠 때는 다 쏟아낸다.
어렸을 때부터 고민상담을 버릇처럼 해 왔다. 해주는 것보단 받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나’라는 판사가 답을 못 내리니 동료 판사에게 답을 구하는 형국이다.
그러나 모순적이게도 친구의 의견을 너무 귀담아듣는 나머지 안 좋은 영향을 미칠 때가 많았다. 친구의 말을 100% 진실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민상담을 받으며 사실 더 불안해졌다.
친구들이 날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나의 고민을 어디 가서 얼굴 모르는 사람한테 공유할까 봐, 나의 약점을 세상에 알릴까 봐. 불안을 해소하려고 고민을 털어놨는데 해소가 되기는커녕 부메랑이 돼 돌아왔다. 심지어 더 크게.
약점이라고 믿는 무언가를 남에게 들추는 일이 나쁜 건 아니다. 어디까지나 개인의 선택이다. 약점 하나가 나 자신 전체를 정의하진 못한다.
다만 나같이 남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면 고민을 나누는 행위가 또 새로운 고민이 되는 역설적인 상황에 놓일 가능성이 높은 것 같다.
언젠가부터 고민을 나누는 게 부담스러워지고, 일 같이 느껴졌다. 내가 고민을 공유한 순간에는 갈증이 해소되는 것처럼 시원했지만, 늘 집에 돌아오면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나에게는 좋은 해결 방법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결국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가장 중요하다. 나에게도 해주지 못한 공감을 타인에게 끝없이 갈구하는 모습이 너무 안타까웠다. 결국 우울만이 남았다. 나는 왜 이리도 나 자신을 믿지 못하는 걸까. 그냥 날 한번 꽉 안아주면 되는 것을.
심보선 시집에서 두고두고 보는 구절이 있다.
‘인생은 설명할 수 없는 일들 투성이’.
‘그래, 그럴 수 있지.’라는 마음가짐을 가져도 되는 이유다. 남에게 답을 구하려 하지 말자. 스스로 찾는 과정을 거쳐야만 괜찮아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