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공쟝쟝 May 15. 2022

외골수의 무자비함으로

필리스 체슬러, 여성과 광기

나 자신에 대해 계속 공부하는 사람이고 싶다. 내가 느끼는 것, 아는 것, 생각한 것을 구분할 수 있는 사람. 그것은 내 몸에도 해당되는 일이라 내 몸에 대해서도 잘 알고 싶다. 어떤 근육이 안써서 짧아지고 있는건 아닌지, 무얼 먹었을 때 컨디션이 좋은지도. 


한달의 서너번은 충분히 웅크리고 들어앉아 책을 읽거나 일기를 쓰거나 하는 사람이고 싶다. 난 그 시간이 제일 행복한데, 언제나 시간이 없다고 생각한다. 무언가 초조하고 조급한 기분을 조율하고 뚝뚝 잠시 멈추어 응시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생각과 대화가 재밌는 사람이 되고 싶다. 알아갈 수록 알아가고 싶은 사람, 이야기에 빠지면 넋을 잃는 사람. 좋아하는 주제가 나오면 눈이 반짝빤짝 하는 사람, 그런데 그 좋아하는 것이 많은 사람. 조금은 다르게 생각할 줄 아는 사람, 그 다름을 조심스러운 태도로 말해서 달라도 존중 받는다는 느낌을 줄 수 있는 사람. 아니, 실제로도 진심으로 존중하는 사람. 진지하면서도 개구진 사람. 


희노애락을 잘 느끼고 표현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잘 웃는 사람, 잘 우는 사람, 정확하게 화내고, 즐거운 와중에서도 왜 즐거운지 아주 자세하게 포착하는 사람. 그래서 언제나 자신을 즐겁게 만들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 때때로 자신에게는 아무일이 없는데도, 누군가 무언가를 대신해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감정에 솔직하면서도, 타인에 대한 배려는 잊지 않는 사람.


맛있는 걸 아주 맛있게 먹고, 또 잘 만드는 요리가 열두가지 정도 있는 사람.

좋아하는 노래를 피아노로 열 곡은 완벽히 쯤 칠 수 있는 사람. 

글을 읽고 쓰는 사람임을 부끄러워 않는 사람.

경제적으로는 자신을 책임지고 단체 다섯개쯤은 넉넉히 후원할 수 있는 사람. 

계절이 바뀌는 것을 해가 지는 것을 바라볼 줄 아는 사람.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 용기를 주는 사람. 

우리를 둘러싼 세상에 대해서도 안테나를 끄지 않는 사람.

어떤 부분에서는 지독한 면이 있는 사람.

모두에게 잘보이려고 하지 않는 사람. 

생각하게 하는 사람. 생각하는 사람.

가끔은 생각을 멈출 수 있는 사람.

취미로 하는 운동이 하나쯤 있는 사람.

동물과 식물을 꾸준히 잘 돌보는 사람.

자기 몫의 삶은 담담히 끌어안을 수 있는 사람.

너무 고생하지는 않았으면, 고통스럽지는 않았으면, 혹은 그런일을 겪어도 기꺼이 잘 사는 사람.

너무 기대를 많이하지 않는 사람, 

그리고 (방법적으로) 잘 실망하는 사람, 혹은 실망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




이 되고 싶다고, 2019년의 나는 썼다. 그 날이 어떤 온도였고 내가 어떤 상태였는지 기억이 난다. 막 페미니즘 공부가 불 붙기 시작할 때 였고, 동생들과 따로 지내기로 마음 먹고 완전히 혼자가 된지 반년은 더 지나서였을 것이다. 


이 때 쯤이었을까, 내가 ‘내’가 되기로 한 게. 내가 다듬어 만들어나가고 있는 ‘내’ 모습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 것은 확실히 이 무렵이었을 것이다. 나 자신‘을’ 나 자신‘만’ 생각한다는 게 그토록 어려운 일이었는지를 묻는다면 적어도 나는 그랬다. 그런데 페미니즘 책들을 읽으면서는 안다. 그건 대부분의 모든 여자들에게 무척 어려운 일이라는 걸. 


조금의 시간이 흐른 지금, 나는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 하고 생각나 읽어보니 가까워진 부분도 있고, 원래 나였던 부분도 있고, 더 노력해야할 부분도 많다. 특히 ‘글을 읽고 때로는 쓴다’는 사실이 이제 더는 부끄럽지 않고 가장 큰 자긍심이 되어있다는 걸 발견했다. 여전히 생각을 멈출 수 있는 수련은 부족하다. 방법을 잘 모르겠다. 지금은 몇 가지 더 추가하고 싶은 문장들이 생겼다.


2022년 새해 맞이 추가 문장


나 자신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사람.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 혹은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

자신을 수정하고 고치는 데 겸허한 사람, 사과를 잘하는 사람 곧 용감한 사람.

시간을 들여 잘 쉬면서 자아에 여분을, 여백을 만들어 두는 사람.

여유가 되면 더러는 없더라도 자주자주 지구를 생각하는 사람. 


위의 것들은 내게 있는 장점들인 동시에 내가 되고 싶은 나의 이상형이다. 


새해 첫날 완독한 필리스 체슬러의 여성과 광기는 “(526) 여성의 가장 중요한 자아 정체성은 제한적이고 특정한 타인들을 위한 관심사와 몇몇 남성을 즐겁게 해주는 것에 근거하고 있다”고 이야기 했다.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딨느냐, 요즘 여자들이 어디 그러느냐고 되묻고 싶겠지만. 인류의 무의식이라는 것은 거대하고 내면화된 훈육이 몸에 작용하는 것은 어마어마하다. 


서른 살에 1차 심리상담을 마무리짓고 가장 크게 인식한 무의식은 나 자신에 대한 엄청난 무관심과 그것에 근거한 타인에 대한 의존심, 그리고 ‘헌신하는 엄마’에 대한 거대한 연민과 분노였다. 앞의 두개는 가까스로 의식화하면서 정신줄 놓고 싶을 때마다 바로잡지만 맨 마지막의 것의 경우는 아무리 페미니즘을 공부해도 어떻게 잘 처리가 안된다. 이를테면 엄마가 아팠을 때, 엄마가 슬퍼할 때, 엄마가 심심하거나 우울하거나 사는 낙이 없다고 말할 때, 나는 정말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주고 싶은 심정이 된다. 그것이 내 탓 같고, 그것을 멈추게 하고 싶고, 그럴 수만 있다면 애라도 덜컥 낳아 안겨주고 싶을 정도다. (요즘의 엄마가 가장 바라는 것은 손자ㆍ손녀 임) 


엄마한테 통째로 나 자신을 넘겨주면서 투항해버리고 싶을 때 마다 나는 손을 꽉쥐고 참는다. (vita언니의 언어대로 손톱을 손바닥에 박아가면서) 엄마가 원하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며, 엄마 그 자신도 원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그래도 가끔은 사실은 자주 엄마가 슬퍼서 미칠 것 같은 감정이 든다. 


“(527~9페이지 이어지는 문장) 여성의 자아정체성은 어떻게든 바뀌어야하고 강인한 개인으로 살아남는 데 필수적인 닻을 내려야 한다. 여성은 많은 일들과 많은 생각, 많은 사람들에 관심을 갖는 것에서 어떻게든 자유로워져야 한다. 자아 초점을 그처럼 급격하게 옮긴다는 것은 극도로 어렵고 두려운 일이다. 모든 ‘여성적인’ 신경과 감정이 날카롭게 자극되면서 심각한 대가가 따르게 된다. 어떤 여성은 그처럼 초점을 이동시킬 때 ‘미쳐’ 버린다. … 열정은 언제나 사죄하거나 자신과 타인 앞에서 스스로를 위장하는 여성적인 행동을 그만두고 *자기 자신의 성장과 생존에 관심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 … 다양한 권력을 ‘남성’이나 ‘가족’을 통해서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쟁취하는 데 관심이 있어 나선 여성이라면 누구든 가부장제의 심리적인 왕국 안에서 급진적인 행동, ‘승리’를 위한 모험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다. 그와 같은 심리적으로 급진적인 행동만이 여성으로 하여금 개인 간의 무수한 차이를 관대하게 견디며 발전시키도록 해줄 것이고 … 이러한 자아 변화에 적극 참여하는 여성들은 필연적으로 개인적인 권력 쟁취와 생존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지 않는 모든 인간 상호작용으로부터 물러나게 될 것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다. 
심리적으로 남성의 생존ㆍ권력ㆍ쾌락보다 여성의 생존ㆍ권력ㆍ쾌락에 좀 더 투자하는 여성이 발전하게 될 것이다. 여성의 신체에 대한 가부장제의 혐오로부터 벗어나야 하며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관계’를 유지하려는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 
여성의 심리적인 정체성은 자신의 생존과 자기 인식에 대한 관심사로부터 구출된다. 여성은 이와 같은 어마어마한 노력을 지지하지 않는 상호작용을 피하거나 포기한다고 해서 따스함ㆍ감정ㆍ양육의 능력을  포기할 필요는 없다. … 여성은 먼저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다른 여성들에게 부드럽게 대하고 연민을 느껴야 한다. 여성은 세계를 ‘구하기’에 앞서, 남편과 아들을 ‘구하기’에 앞서 자기 자신과 딸을 ‘구하기’에 나서야 한다. 여성은 오로지 배우자나 생물학적 자녀를 갈망하고, 보호하고, 보살피는 외골수의 무자비함을 *자기보존과 자기계발에 집중하는 ‘무자비함’으로 바꾸어야한다.* …
여성은 정서적인 위안과 애정에 대한 자신의 (대체로 충족되지 않았던) 욕구를 부정할 필요가 없다. 사실은 여성은 자유와 존엄을 상실하지 않고서도 이런 욕구를 만족시킬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사랑에 대한 여성의 욕망은 다양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충족되어야 하며, 그 방식은 무력함에 지배받는 사건들이 아니라, 그런 사건들과 대조되는 방식이어야 한다. 여성들 사이의 애정과 섹슈얼리티는 행동과 승리, 사상과 지혜가 서로 잘 어우러지면서도 뚜렷이 드러나는 것이어야 한다. 
내가 거론하고 있는 여성의 자아 변화는 심리적인 변화임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여성들의 경제 생활과 재생산의 영역에서 핵심적인 변화가 일어난 후에야 비로소 대다수 여성들이 그런 심리적 변화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일부 젊은 여성들, 아마도 극소수의 여성들만이 오직 자각으로, 이해의 힘으로 그런 변화에 영향을 미칠 수 잇을 것이다. 이 자각이 지혜로 화할 때 필요한 행동이 수행될 것이다.”


가져온 이 페이지들을 씹어서 먹어버리고 싶었다. 나는 이걸 하고 있었고, 이걸 포기할 생각이 없구나. 나는 이걸 할거고 이걸 하겠다는 선언이 2019년의 저 일기였구나 하는 걸 생각해냈다. 필리스 체슬러 말마따나 내 엄마가 가족에게 헌신했던 ‘무자비함’ 수준을 엄마 딸인 나의 ‘생존’과 ‘자기계발’에 집중하는 ‘무자비함’으로 바꾼다면… 아, 도서관 하나 쯤은 통째로 내것으로 만들어야겠구나. 


살아남아야지. 먼저 나를 구하고 그 다음에는 여자들을 구해야지. 여자들을 미워하지 말아야지. 엄마 말을 듣지 말아야지. 엄마 말을 듣지 말아야지. 엄마 말을 안들어야지. 엄마 말을 안들어야 한다. 엄마가 짠해질 때 마다 내 삶은 사라진다. 엄마는 엄마 자신을 거의 없애버렸기 때문에 나한테 완전하게 영향을 미치려고 들지만, 그래서 종종 나는 엄마를 생각하면 나를 없애고 엄마가 되어버리지만. 언제부턴가 생겨난 나 자신에 대해서 계속 공부하는 나는, 나에게 너는 어떠니라고 물어보는 나는, 글을 쓰고 책을 읽는 나는, 그건 내가 만든 ‘나’다. 그것은 자꾸자꾸 사랑해서 물거품이 되어사라지려고 하는 나를 가까스로 구해낸다. 이건 ‘나’다. ‘나’는 엄마를 사랑한다. 그런데 엄마가 나를 사랑한 방식과는 다른 나의 방식으로 사랑한다.


주먹을 꽉진다. 이기적인 년, 지만 아는 년, 자의식 과잉이시네요, 글에 자기 자신이 너무 많은 것 같은 데, 너무 주관적이시네요, 그렇게 살아서 사회생활 가능해?(쌉가능이다 나에겐 소극적으로 잡아 31가지의 페르소나가 있다, 우하하)와 같은 말들을 비롯해 자신의 저 자신도 알지못하는 욕망을 꾸준히 투사하며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모종의 시선들까지도 기꺼이 받고 때로는 쳐내면서 나 자신을 살거다. 기구하게 사는 게 아니라 잘 살거다. 책 속의 여자들은 미쳐있지 않았다. 미쳐있는 것은 오천년 치의 여성억압이며, 만연한 여성혐오사상이다. 미친 세상에 적응하지 않아 미쳐버린 여자들을 찾아 읽을 것이다.


출발점은 나의 자아에 초점을 맞추는 것. 나는 내가 된다. 

딱히 그것말고 할 것이 없는 간단하고 심오한 혁명이다. 이러한 시대에 태어난 것이 감사할 뿐.


                            

여성은 다른 사람의 힘과 기술에 대한 사랑과 의존을 자기 자신의 모든 힘과 기술에 대한 사랑으로 전환해야 한다. ...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훈련과 용기와 신념과 분노와 행동할 수 있는 능력과 벅찬 기쁨과 절박함이 요구된다. - P525


여성과 광기 (원제 : Women and Madness)

2022-01-04


매거진의 이전글 너무 대낮의 산책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