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에는 두가지 신화가 있다. 한가지는 많은 시도, 다른 한가지는 전문가 그룹이다. 이 신화가 등장한 배경을 설명하면, 디자인은 일종의 계획이기에 비용을 딱히 매길수 없다. 클라이언트 입장에선 그저 대화를 통해 좋은 아이디어를 얻었을 뿐인데 굳이 내가 돈을 줄 필요가 있을까 한다. 반대로 생각하면 그 아이디어는 그의 운명을 바꿀 것이란 점에서 엄청난 비용을 줘도 아깝지 않다.
-
워렌버핏과의 한끼 식사 비용이 35억원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좋은 사람과의 만남과 대화는 그 자체로 정말 중요하다. 디자이너와의 만남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디자이너면 다 비슷할 것이라 여기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버핏과의 대화가 내 투자의 방향을 정해주듯, 디자이너와의 대화가 내 비지니스의 방향을 정해준다는 점에서 좋은 디자이너와의 대화는 나를 성공으로 이끌지만, 나쁜 디자이너와의 대화는 나를 실패로 인도한다. 때론 나쁜 디자이너는 클라이언트 본인 자신일 때가 많다. 디자이너의 의견을 경청하지 않고 모든 것을 혼자 결정하고 오히려 가르치려 드는 분들이 꽤 있는데... 이런 경우에는 정말 난감하다. “그냥 본인이 하면 될걸 나를 왜 불렀지?”
-
그래서 디자이너들은 이런 클라이언트를 다루는 기술을 익혔다. 많은 시안, 그리고 디자인 외 전문성에 기대기이다. 나도 예전에 공모전을 할때 첫번째 기술을 쓴 적이 있다. 보통 공모전에 출품하면 1-2점을 잘 만들기 마련인데 우리팀은 기본 20개 많을땐 50개를 만들었다. 주변 친구들의 핀잔도 들어가면 열심히 만들었다. 이 노력을 이해해 줄거라 생각하며. 하지만 난 알고 있었다. 이중 90%가 쓰레기라는 점을. 이는 80-90년대 미국에서도 많이 쓰는 기법이었다. 지인이 근무했던 한 광고회사는 클라이언트 미팅 때마다 시안을 500개씩 가져갔다고 한다. 물론 대부분 쓰레기였지만, 그래야 클라이언트가 좋아하니까. 그 회사는 세계 최고의 광고회사가 되었다. 물론 오래가지 못했지만.
-
두번째 신화는 전문가 그룹이다. 빅터파파넥에 취했던 나도 한때 이 신화에 매몰되었다. 매번 전문가 그룹의 의견을 경청하며 프로젝트를 진행하곤 했다. 그때마다 드는 생각은 다소 시간낭비란 느낌이었다. 왜냐면 그분들은 문제에 대해 고민과 애정이 깊지 않았고 회의는 잘난척 대행진이었다. 당연히 의견이 모이거나 타협될리 만무하다. 왠지 디자인 프로젝트라면 새롭고 창의적인 생각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져서인지 말도 안되는 의견을 고집하는 경우도 많았다. 수년전에 모 미국기업이 이 신화를 활용해 유명해졌는데, 알고보니 거기도 만만치 않았더라. 지금은 어찌되었나 모르겠다.
-
나는 좋은 디자이너는 어떤 사람일까 늘 고민한다. 이 주제는 나의 오랜 벗같은 느낌이다. 요즘 드는 생각은 일종의 산파나 교사 같다는 느낌이다. 이 생각은 이성민 샘이 번역하시는 <디자인의 철학>(글랜파슨스)에 나오는데... 맥락은 둘째치고 오랜 경험상 너무 공감된다. 이제 물량과 전문가 공세는 그만두고 클라이언트 스스로 좋은 아이디어를 낳도록 산파나 교사 역할에 충실하려 한다. 그러면 내 스스로 좋은 대화 상대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