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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륜 May 23. 2021

상상의 질서 속에서 믿음이란

사피엔스 / Yuval Noah Harari


그의(his) 이야기(story)를 나의 이야기로 읽지 않으면 역사는 재미없다. 하리리는 역사History란 다른 모든 사람이 땅을 갈고 물을 운반하는 동안 극소수의 사람이 해온 무엇이라고 정의해버린다. 그의 상상력은 세상의 모든 지식을 통찰하며 우리의 믿음을 난도질한다.


우리는 전쟁 장면에서 비명소리도 들리지 않는 쓰러져버리는 시체 하나일 뿐이다. 객관적 진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믿으면 더 나은 사회가 될 거라는 믿음, 그 상상의 질서 속에서 언제 죽음을 당할 지 모르는 미물들이다. 적어도 이 책을 읽고 고민하는 평민들은 그렇다. 이 책을 추천한 마크 저커버그나 제레드 다이아몬드 정도면 주연급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우리는 그 상상의 질서를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 감옥 벽을 부수고 자유를 향해 달려간다 해도 실상은 더 큰 감옥의 더 넓은 운동장을 향해 달려나가는 것일 뿐이다.//


하라리의 논리는 새롭지 않다. 역사와 과학으로 과거와 현재를 통찰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상상하지 않았을 뿐, 이미 일어난 사실을 어느 편에 서지 않고 예를 들어 이야기로 들려주고 있다. 그런데 읽는 동안 소름이 끼친다. 일주일 동안 씻지 않고 있다가 거울을 들여다 본 기분이다.


맥그라스의 <기독교 역사> 칠백 페이지를 읽을 때보다 더 힘들었다. 우리는 누구인가? 왜 이 책을 읽어야 하는가? 고민했다. 반 쯤 읽고 책을 덮어놓고 자전거여행을 떠났다. 북한강으로, 동해안으로, 섬진강까지 300km 쯤 달렸다. 보름 동안 책 한 줄도 성경 한 줄도 안 읽었다. 남편과 나는 산으로 바다로 들로, 바람과 햇살과 빗방울 속에서 우리들의 스토리를 만들었다.



그 와중에 짬을 내어 <블레이드 러너 2049>를 보았다. <블레이드 러너 2019>의 후속편이라는데 놀라운 것은 전편의 설정은 후년이었다는 점. TV에서 전편을 다시 보았다. 컴퓨터는 지금보다 조악하고(거의 1990년대 디자인이다) 도시 환경은 더 비참하다. 2년 후에 그렇게 될 가능성도 없지 않겠지만 작가와 감독의 예측은 빗나갔다.


유발 하라리의 책과 우리의 자전거여행 그리고 블레이드 러너. 모두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일들이 모두 현재 나에게 일어난 일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역사를, <블레이드 러너>는 미래를, <자전거 여행>은 현재의 나를 통찰하고 있다. 내가 움직일 수 없는 역사는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 나는 고작 두 바퀴로 달릴 수 있을 뿐인데.


<호모 사피엔스>를 읽으면 믿음을 잃을 수도 있다. 진화론 때문이 아니다. 모세가 창세기를 쓰기 이전의 역사가 기록으로 발견되었고, 기독교는 역사 속에서 그 가치를 잃을 만큼 죄악을 저질렀으며, 자본주의와 결혼하여 인본주의라는 자식을 낳았다는 것은 이미 모두 증명된 사실이다. 교회에서 듣지 않아도 우리의 손을 뻗어 책을 읽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기록된 역사다.


제국의 역사가 시작되고 주인이 바뀌는 시대에 그리스도는 예언되었고 태어났다. 자본의 시대가 시작되는 시기에 모세와 예언자들이 기록한 그리스도가 세상의 가치와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음을 본다. 그 방향은 어떤 경제원리나 이데올로기와 같지 않다. 그렇지만 그 모든 것을 부정하지도 않는다. 다만 우리가 향해야 할 길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기독교를 숭배했던 많은 나라들이 가나안을 정복했던 백성들에게도 없었던 상상의 믿음으로 식민지의 원주민들을 학살했고 이방인들을 탄압하며 예수님을 팔았다. 그들은 역사를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용했으며 그들의 최고 선善은 돈이었음을 교묘히 감추고 포장했다. 지금도 우리들은 교회에서 자본주의의 핵심 신조를 위해 기도한다. 경제가 발전하고 정치적으로 안정되도록 해주시길. 우리는 이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단은 이 때를 틈타 새로운 교리를 설파하며 어리둥절하고 있는 이들의 삶을 가로챈다.


우리가 믿는 진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선한가? 믿음을 잃어도 살 수 있지만 돈이 없으면 살 수 없다. 돈은 인류가 지닌 관용성의 정점이며 집단적 상상의 산물에 대한 믿음의 끝이자 상호신뢰시스템의 최강이다. 기독교인도 무슬림도 돈 앞에서 한 마음이 되며 같은 은행에 같은 믿음으로 돈을 예치한다.


하라리가 말하는 상상의 질서가 우리 욕망의 형태를 결정한다면 무엇을 욕망하는가는 우리가 믿는 상상의 질서를 좌우한다. 객관적 진리가 아니라 더 나은 사회가 될 거라는 믿음 때문에 세상은 어떤 존재와 가치들을 욕망한다. 더 나은 사회란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가?


그의 논리로 말하자면 기독교는 공통의 신화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한다. 세상의 사실을 낱낱이 알수록, 역사를 꿰뚫어  수록 우리의 믿음은 흔들린다. 그러나 나는 믿음을 잃지 않았다.  높은 가치가 <호모 사피엔스> 뛰어넘는 곳에 있다고 믿는다. 하라리의 통찰에 감탄할 수록 선명해지는 믿음의 역설이 내가 선택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는 무엇을 욕망하는가?


내가 역사의 어떤 부분도 바꿀  없지만 "답을 얻을  없는 질문을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라리의 말처럼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그리스도를 통해 묻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믿음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선택 받은 운명의 다른 이름인 은혜라는 것을 안다. 하나님 나라가 무엇을 욕망하는지를 질문하는 과정이 나의 역사라는 것을 믿는다. 세상을 알아갈 수록 인간의 욕망과 선택이 죽음 앞에 무력함을 느낄  영원을 찾아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길이다.  믿음의  위에 내가 걷고 있음에 감사하다. 인간의 역사와 과학적 통찰은 믿음을 약하게 하지 않는다.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실체를 자세하게 보여주는 돋보기와 같은 것일 뿐이다 .


P.S. <블레이드 러너 2019>의 놀라운 점은 인간과 흡사한 안드로이드가 존재했다는 설정.


이 영화는 E.T. 와 같은 해에 제작되었다. 시대를 통찰하는 이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시킨다. 하라리와 같은 이들에게 우리는 늘 선수를 뺏기고 마냥 입 벌리고 감탄한다. 자전거를 타고 달리며 이 박탈감을 이겨본다. "그래도 어쨌든 두 바퀴를 돌리는 것은 오직 내 허벅지의 힘이라고!" 이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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