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남편덕후 Apr 25. 2021

뒷조사

남편덕후 비긴즈 7

볕 좋은 토요일. 식탁에 앉아 빵이랑 우유를 옆에 놓고 야심 차게 노트북을 연다. 심호흡 한 번 하고, 검색창을 열어 스승님의 이름 석 자를 검색. 조금 스토커 같다는 생각이 들어 아무도 없는데도 눈치를 살피게 된다. 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얼굴들이 화면을 채운다. 내가 찾던 얼굴은 없다. 그럼 이름+전도사 검색. 음, 이것도 아니군. 회사 주소록에 적힌 메일 주소를 찾아본다.


<몇 가지 소득>

1. 어느 헌책방 웹사이트에서 그분의 글을 발견했다. 90년대에 만든 듯한 홈페이지, 투박한 로고. 이런 데서 책을 사나 싶은 작은 서점. 꽤 오래전 절판된 책에 대한 문의였는데, 구구절절 꼭 그 책을 구해야 한다는 예의 바른 글이었다. 2.한 교회 sns에서 발견한 사진. 예배당을 꽉 채운 사람들, 그 앞에 스승님이 손을 모으고 서 있다. 어깨가 넓은 옛날 양복 차림,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얼굴. 'ㅇㅇㅇ전도사 사임'이라는 글이 써 있는 걸 보니 교회를 떠난 날인 듯하다. 무거운 마음이 사진 한 장에 이렇게 다 보일 수 있다니, 나도 마음이 아린다. 3. 교회 sns를 더 뒤져보니 체육대회 사진이 여러 장 있었다. 격렬하게 시합을 벌이는 남자 집사님들 사이에서 호루라기를 불며 가볍게 뛰고 있는 심판. 스승님이다. 이렇게 보니 굉장히 날렵해 보이시네.


sns는 안 하신다고 하셨고. 그렇다면 대한민국 2030은 누구나 거쳐 갔을 바로 그 sns, 싸이월드로 간다. 대략 지역과 생년, 이름을 검색하니 동명이인이 손에 꼽힐 정도로 추려졌다. 불꽃 클릭에 지칠 무렵, 바로 그분의 싸이월드를 발견했다! 십 년이 넘게 방치되었을 공간. 아쉽게도 대부분의 메뉴는 닫혀 있다. 내 싸이월드 bgm이었던 '소원'이 흘러나와 입을 틀어 막았다. 뭐지? 혹시 운명 같은 건가? 마음을 가라앉힐 겸 다른 곡들도 들어보며 취향을 가늠해보다가, 유일하게 열려있는 방명록 첫 페이지를 눌러본다. 대학생 시절 친구들이 남긴 글들로 방명록이 시작된다. '너의 찬양이 얼마나 큰 은혜가 되는지 넌 모를 거야", "네가 기타치며 찬양하는 걸 보면 다윗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이 상상되는 거 아니? 하나님 앞에 늘 정직한 찬양을 드리는 모습이 참 귀해...축복한다" 오...찬양 인도를 하셨나보다. 분명 회사에서는 노래도 못 하고 악기도 못 다룬다고 하셨는데. 겸손의 왕이시네. '오늘 아침 모임에서 너의 큐티 나눔에 큰 위로를 받았어. 마음이 뜨거워지더라...하나님이 너에게 주신 귀한 은사인 것 같다. 고마워' 방명록의 글을 하나하나 읽어갈수록, 따뜻하고 즐겁게 캠퍼스 사역을 하는 어린 스승님의 모습이 펼쳐진다. 지금 내가 느끼는 인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오히려 더 좋은 사람이네. 어떻게 사람이 흑역사가 없지? 하지만 분명 조금 더 읽다 보면 생각지 못한 과거가 나올 것 같아 내심 불안하다. 구여친의 글이나 그때 그 시절 허세가 담긴 비속어 정도는 나오겠지. 마음의 준비를 하고 계속 읽어나간다.


'ㅇㅇ야~ 선교 떠난다는 소식 들었어. 너를 위해 기도할게. 도착해서도 소식 남겨줘!','거기 날씨는 어때? 밥은 잘 먹고 있는지 궁금하다~' 사랑이 담긴 지인들의 글에서 그가 아프리카로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 말은 못 들었는데 왜 말 안 하셨지. 나 같으면 엄청 자랑하고 다닐 텐데. 선교사님 댁에서 잘 있다는 소식과 한국 음식이 그립다는 가벼운 안부가 이어진다. 그러다 생각지도 못한 글에서 마음이 내려 앉았다. '소식 들었어...기도할게...', '한국에 온 거지? 연락줘', '어떻게 위로를 해야 할지...모두가 너를 위해 기도하고 있어', '너무 마음이 아프다...' 한참동안 많은 글을 읽고서야 아버지가 돌아가신 시기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감히 가늠해볼 수도 없는 슬픔의 시간이었겠다.


 그의 시간에는 신기하게 얼룩이 없었다. 꾸준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변 사람들과 축복이 담긴 안녕을 주고받은 사람 같았다. 슬픔의 시간도 기쁨의 시간도 그의 인생에서는 모두 고요히 흘러가고 있었다. 과거의 스승님이 남긴 댓글은 모두 단단하고도 정갈했다. 이런 사람이 세상에 있었다니. 그가 살아온 시간에 함께 휩쓸리다 보니 어느덧 해가 저물고 있었다. 밭에 숨겨진 보물을 발견했다는 게 이런 걸까? 가슴이 너무 뛰어 일단 보물 상자를 닫듯 노트북을 닫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