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두툼하게 쌓인 종이들이 지게차에 옮겨지고 있었다. 언젠가 책이 되거나 포장지가 되거나 아무튼 무엇이 될 것들이 분명했다. 책에서 풍기는 묘한 냄새를 좋아하는 나는 혹시 지금 멈출 줄 모르고 걷는 나의 발걸음을 사로잡아줄 냄새가 풍기지는 않을까 기대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계속 앞으로만 걸었다. 지게차에 부딪히지 않도록 조심하며.
이런 곳에 음료를 마실 수 있는 곳이 있을까 싶었는데, 있었다. 한참을 걸어서 당도한 곳이었다. 손목에 붙어있던 시계가 몇 번이고 '현재 하고 있는 운동을 기록할지' 물었다. 나는 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곳을 찾기 위해 무한정 걸었을 뿐이었다. 사실 적어도 지하철 두 세정거장 정도의 거리를 걸었으니, 시계가 충분히 오해할만했다고 생각하며 나는 다시 계단을 올랐다. 좁은 계단은 이곳이 얼마나 오래된 건물인지를 짐작하게 했다. 폭은 좁았고 계단은 높았다. 벽면에 종이에 아무렇게나 인쇄된 공간의 이름이 보였다. 나는 종이의 환함과 고딕체의 무심함이 툭 던져놓은 이정표를 따라 계속해서 위로 올랐고 결국 철문을 맞이했다.
굳게 닫힌 철문 안에서는 어느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장르였지만, 이미 많은 이들이 좋아하고 있는 장르임이 분명했다. 철문을 열기 전, 숨을 골랐다. 차오른 숨은 쉽게 꺼질 줄 모르고 나는 굳게 닫힌 철문만을 바라봤다. 정확하게 공간의 이름이 쓰여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이 맞는지, 이곳에 정녕 내가 찾아온 곳이 맞는지를 고민했다. 많은 이들이 음악을 즐기는 것을 내가 문을 엶으로 인하여 방해하지는 않을까, 불청객의 꼬리표를 달지는 않을까 고민했다. 그런 사이 몇몇 사람들이 철문을 열고 닫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없나 보다,라고 또 혼잣말을 했다. 요즘 들어 부쩍 혼잣말을 자주 했다. 혼잣말은 내가 나와 이야기를 하는 수단으로 사용됐다. 여기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없나 봐, 그럼 다른 걸 주문하자, 정도의 짧은 대화가 입술과 미간을 오갔다. 작은 케이크와 음료를 무리 없이 주문하곤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멋진 사람들이 많았다. 멋진 사람들이 삼삼오오 앉아 빵과 케이크와 커피와 각종 음료를 이야기와 버무리고 있었다. 그들은 옷차림도 멋졌다. 흘러나오는 알 수 없는 장르의 노래가 사람이라는 형체를 가진 듯했다. 옷의 색감도, 머리카락의 색감도, 모두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그들은 나처럼 서로를 힐끔거리지 않았다. 마구마구 자신을 발산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이 모든 것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잊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음료와 케이크가 내 앞에 늘어섰다. 내가 이곳에 온 것을 잊지 않기 위해 음료와 케이크를 바싹 붙인 채 사진을 찍었다. 한컷에 담기는 것들은 우아했다. 나도 이 감각적인 색상의 케이크처럼 나의 색감을 찾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한동안 포크를 들지 못했다. 겨우 음료만 한 모금 마셨을 뿐이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그들은 없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나는 내 뒤통수에 눈이 달려있지 않은 것을 감사히 여겼다. 만약, 내 뒤통수에 눈이 달려 있었다면 그 눈은 이곳저곳 시선을 옮기다 결국 누군가에게 험악한 소리를 들었을지도 몰랐다.
직원이 다가왔다. 죄송하지만, 주문 한 번만 더 확인해드릴게요. 요청하지 않은 부분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어떤 문제가 있느냐, 왜 그러시냐 따위의 말은 혓바늘에 걸릴 뿐 앞으로 튀어나오지는 않는다. 나는 살면서 삼키는 말이 무척이나 많은 편이다.
케이크는 돌아오지 않았다. 다른 사람에게로 가야 할 케이크가 나에게로 온 것이었다. 그럴 수도 있지. 나는 생각했다. 불편하지 않아, 괜찮아. 나는 생각했다. 음료를 한 모금 마셨다. 깜빡 잊고 읽을 책을 가져오지 않은 것이 후회스러웠다. 하지만, 한편으론 다행스럽기도 했다. 덕분에 귀가 활짝 열렸다. 주변 이야기의 짤막한 키워드가 귀를 탕 치고 흘렀다. 책을 가져왔어도 오묘한 노래에 휩쓸려 단 한 자도 읽지 못했을 것 같았다.
케이크가 돌아오지 않는다. 다른 사람에게로 가야 할 케이크는 잘 갔다 치더라도 나에게 올 케이크는 왜 오지 않는가. 나는 주변을 둘러본다. 모두가 적당한 음료와 케이크를 가지고 있다. 나만 케이크가 없다. 분주한 카운터를 바라본다. 바쁘시겠지. 나에게 줄 케이크를 만들고 계시겠지. 나는 카운터를 바라보던 것을 그만두고 음료를 마셨다. 그 후로 나의 옆 좌석의 사람이 바뀌고, 하하호호 웃으며 이야기하던 두 남자가 서로에게 싫은 소리를 하며 얼굴을 붉히고 나갈 때까지 나의 케이크는 오지 않았다.
난감하다. 이럴 때 제일 난감하다. 나서서 무언가를 말해야 할 때 나는 입을 떼기도 전에 지친다. 나는 어딘가로 전화를 할 때, 연습장 빼곡히 내가 할 말을 안녕하세요부터 적는 사람이다. 준비되지 않은 말을 하는 것엔 노련하지 못하다. 술술 말이 쏟아져 나올 때는 그야말로 또 다른 적색경보가 울릴 시점이다.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오로지 상황을 잘 넘어가고 싶은 욕심으로 말을 뱉는다. 그렇게 뱉은 말들은 대부분 긴장에 묻힌다. 그래서 나는 긴장만 기억하게 된다. 당황하는 나의 모습,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말을 뱉으려는 나의 모습……. 싫어도 어쩔 수 없는 나의 모습.
혹시 제 주문 다시 한번 확인해주실 수 있나요. 카운터의 직원들이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본다. 나는 괜히 그들에게 미안해진다. 이제 막 바쁜 것을 끝낸 그들이 다시 나로 인해 바빠질 것을 걱정한다. 그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한 후, 확인해보겠다고 말한다. 나는 자리로 돌아간다. 어느 직원이 다가와 말한다. 죄송해요, 아까 이 테이블로 잘못 온 케이크 건을 해결하다가 주문이 누락되었어요, 금방 다시 해드릴게요. 나는 웃으며 그러라고 한다.
나는 방금 나의 웃음이 굉장히 바보 같았음을 깨닫는다. 조금만 더 빨리 이야기할걸,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을 때 바로 알아볼걸. 나는 왜 매일 이렇게 느릴까. 잘 짜인 세상은 내가 조금만 늦어도 모든 것을 잃게 만들거나 후회하게 만들기 충분하다. 이러한 세상에서 나의 느린 한 박자는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돌림 노래처럼 나를 압박한다.
케이크가 왔다. 음료를 다 마신 후에야 케이크가 왔다. 케이크는 뻔뻔하게 나의 앞에 있다. 다 마신 음료 잔에선 얼음이 식은땀을 흘리고 있다. 케이크는 시그니처 음료랑 마시는 게 제일 맛있다고 했는데. 그래서 왔는데. 나는 애꿎은 빨대만 입에 문다. 음료를 한 잔 더 마시고 싶지는 않다. 나는 퍽퍽하고 진득한 케이크를 입에 꾹 밀어 넣었다. 음료를 좀 천천히 마실걸 그랬나. 나는 자책한다.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말을 고르느라 필요한 말을 하지 못하는 나에게 책임을 돌린다. 나는 자책을 거듭하며 다시 소심해진다. 매번 한 박자 느리거나 괜히 빠른 나는 꼭 이렇게 한 번씩 발동해 나를 소심한 구석에 가두곤 했다. 자책과 후회는 나만의 몫이었다. 처음 듣는 노래가 자꾸만 마음을 어지럽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