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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단한 Mar 17. 2024

동물의 왕 사자도 20시간을 잔단다

노트북이 고장 났다. 아예 마우스가 작동하지 않고, 화면이 멈춰 저장조차 되지 않았다. 열심히 글 쓰는 중이었다. 노트북이 고장 날 것이란 건, 나의 생각 어느 범위도 차지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던 중, 갑자기 노트북이 멈췄고 다시 움직이지 않았다. 6~7년 정도 쓴 노트북이었다. 그나마 문서 작업만 해서 튼튼하게 오래 쓸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언젠가부터 웅웅, 힘들어하는 소리를 내기 시작하더니 그냥 멈춰버렸다. 힘들어하는 소리를 냈을 때 조금 더 신경을 쓸 걸 그랬다. 그걸 듣고도 아직은 더 움직일 수 있을 거라 착각해 버렸다. 


덕분에 노트북을 새로 사게 되었지만, 그전에 있는 모든 파일은 이미 저장이 되지 않은 상태로 날아가버려 다시 소생시킬 수 없었다. 그동안 썼던 모든 글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허망함을 느꼈다. 정말 엎친 데 덮친 격이라는 문장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쓰면 된다만, 마음을 먹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나도 웅웅, 힘든 소리를 내고 싶었다. 그러나, 어쩌겠나. 다시 해야지. 기억을 더듬으며, 글을 써야지. 


누구도 탓하고 싶지 않았고,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다. 잘 살피지 않은 내 탓이고, 저장을 제때 해놓지 않으면서 외부 장치를 사용하지 않았던 내 탓이기도 하다. 그러나, 친구는 말했다. '그게 날아갔다고 해서, 네가 여태 했던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니까 너무 그렇게 생각하지 마'라고. 그러고 싶었지만, 그냥 늘어지고 싶었다. 이걸 핑계로 그냥 엎어지고 싶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고, 그저 우울하고 싶었다. 우울했다. 우울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글 쓰는 것을 포기할 순 없었다.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이게 뭐라고. 다시 쓰면 되지. 


엄마가 나와 함께 노트북을 보러 동행해 주었다. 엄마의 손을 꼭 붙잡고 노트북을 고르는 동안, 마음이 요동쳤다. 내가 돈을 잘 벌어서 노트북 하나쯤 턱턱 사면 좋으련만, 그런 생각이 들어 미안했다. 그러나, 엄마는 미안하다는 소리 그만하고, 더 열심히 글을 쓰라고 나를 격려해 주었다. 첫 노트북도 엄마가, 두 번째 노트북도 엄마가 사줬다. 나는 아기가 된 느낌이었고, 아기가 되고 싶었다. 그냥 잠만 자고 싶었고, 움직이기 싫었다. 그러나, 아기가 되더라도 그냥 잠만 잘 수 없다. 뒤집기도 해야 하고, 이도 나야 하고, 움직여야 하고, 기어야 한다. 


새로 산 노트북을 들고 카페에 향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고, 오로지 내 노트북만 변했다. 똑같은 커피를 시켜놓고, 글을 쓰기 위해 노트북을 열었다. 잠금 번호를 누르기 전, 커다란 사자의 얼굴이 화면을 꽉 채웠다. '동물의 왕 사자도 20시간 동안 잠을 잡니다. 사냥은 암컷이 합니다. 왕이 참 좋네요.' 문구가 떴다. 20시간이나 잠을 잔다고? 동물의 왕이면서? 나는 의아한 마음에 그 글을 클릭했고, 곧이어 설명을 읽을 수 있었다. '사자는 적응력이 매우 높아서 아주 건조한 지역에서도 살 수 있습니다. 암컷이 사냥을 하는 동안, 수컷은 영역을 보호합니다. 늙어감에 따라 인상적인 갈기가 생겨나는데, 이는 싸움 중에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수단이 됩니다. 사자의 울음소리는 무려 8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 들립니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에 매혹되어 읽어본 글이었는데, 아예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된 후 웃음이 났다. 동물의 왕 사자도 잠을 20시간이나 자는데 나도 자면 안 될까, 싶었던 안일한 생각이, 그렇게 자더라도 왕인데, 나도 그럴 순 없을까 했던 안일한 생각이 날아갔다. 적응력도 높고, 그만큼 연륜이 쌓이고, 자신이 맡은 (영역을 보호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말이 인상 깊었다. 


지치지 않고 계속 걸으며 이곳저곳에서 날아오는 모든 일에 깊이 적응해야겠단 다짐이 생겼다. 인간도 동물이고, 환경에 적응하는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 나도 새롭게 나에게 도래된 여러 환경에 적응하면서, 조금은 게으르고, 조금은 우울하면서, 오늘을 살아야지. 사실, 이 글을 발행하고 난 다음엔 또 뭘 해야 할지 아직 정하진 않았지만, 분명 나는 또 무엇을 하며 하루를 보낼 것이다. 그것이 지극히 우울한 일이더라도. 어쩌나,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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