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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단한 Mar 14. 2024

할 일 목록을 쓰지 않은지 오래되었다.

언젠가의 글에서 썼던 것 같은데, 이 글로 나를 처음 접하시는 분들이 있을 수 있으니 간단한 설명을 먼저 붙이겠다. 나는 ADHD를 가지고 있다. 어떤 ADHD냐 하면, 음. 정신없고 산만한 것도 약간 내포되어 있지만, 더 크게 볼 때 '완벽주의'에 가까운 것을 가지고 있다. 사실, 내 삶을 보면, 그렇게 완벽하지도 않은데, 완벽하지 않으면 못 견디는 ADHD를 가지고 있다니 아이러니하다. 이 ADHD로 인해서 내가 완벽해졌냐면, 그건 또 아니다. 


가끔은, 몰아서 방청소를 하기도 하고, 그간 버릴까 말까 고민했었던 옷이나 책을 단번에 해내곤 한다. 그때만큼은, 결정을 내리는 것에 자신감이 생기고, 마치 각성한 것처럼 방을 깔끔하게 치워내곤 한다. 그러나, 그때뿐이지, 그다음부터는 '완벽하지 못한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완벽주의 ADHD'가 발동하여 나를 괴롭힌다. 완벽과 게으름 쪽에 굳이 내가 가까운 곳을 고른다면, 게으름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런데, 완벽주의가 발동한다. 누워 있으면서도 해야 할 일을 생각하고, 하지 못하면 괴로워한다. 


특히나 나는 오래된 습관 하나가 있다. 자기 전에 다음 날 해야 하는 일의 목록을 작성해 놓는 것이다. 시간까지 세세하기 쓰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할 일 목록을 적은 지는 좀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샤워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내가 다음날 해야 할 모든 일들에 관해 빼곡하게 적어놓는다. 그리고 다음날이 되면? 거의 반절은 하지 못한다. 그냥 넘어가기 바쁘다. 했다고 치는 것들이 많다. 그렇게 해서라도 이 일을 다 했다고 합리화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그 일을 다 해내지 못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무엇을 하느냐. 자책을 한다. 왜 이 일을 다 하지 못했을까, 고작 메모지 하나를 채울 만큼의 일을 왜 슬기롭게 해내지 못했을까, 왜 나는 게으른가. 자책에 자책을 더한다. 


메모장에 빼곡하게 쓰인 할 일 목록은 사실, 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 절반이기도 하고, 당장 하지 않아도 별 탈이 없는 일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그걸 하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나를 미워하고, 자책한다. 이 게으른 녀석! 이 우울한 녀석! 이런 식으로. 그러다 보면, 점점 자신감을 잃게 되고, 점점…… 더 많은 것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고, 더욱 할 일 목록을 빼곡하게 채운다. 


그러던 내가 언젠가부터 할 일 목록을 쓰지 않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시간을 보면서,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하고 해내기 시작했다. 움직이기 시작했다. 메모지 하나에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진짜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하고 직접 움직이며 그때그때 일을 해치우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훨씬 일의 효율성이 높아졌고, 더욱 만족감이 높아졌다. 사실, 얼마 전까지는 우울증에 물들어 있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목적으로 잡은 날도 있었다. 나는 그 일을 착실히 해냈다. 그러다가 움직이고 싶어지면 움직였다. 


여태 나를 통제하는 것은 나였고, 나를 자책하게 하고 힘들게 만드는 것 역시 나였다. 그것을 아주 자연스럽게 '하지 않는 행위'로 인해서 알게 된 나는 이제 조금 더 깔끔하고 효율적으로 하루를 살고 있다. 우리는 사실 게으르지 않다. 각자가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고 있다. 그러므로, 삶에 대한 자책은 이제 하지 않기로 한다. 조금만 더 효율적으로 살아보기로 한다. 부담은 가지지 않되, 책임감은 가지는 방향으로. 그랬더니, 나는 아주 조금씩 괜찮아지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느낀다. 


오늘 나는 책 한 권을 읽기로 했다. 이제 첫 장을 펼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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