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할과 맥락을 부여하는 방법
주식 관련 뉴스 좀 정리해줘.
ChatGPT에게 물었더니, 월스트리트저널부터 블룸버그까지 주요 뉴스 열 개를 나열해줬습니다.
틀린 말은 아닌데, 쓸모가 없었습니다.
제가 원한 건 세계 경제 뉴스가 아니라, 제가 가진 종목에 영향을 줄 만한 소식이었거든요.
다시 말해야 했습니다.
아니, 미국 기술주 위주로, 전일 대비 등락이 큰 것 중심으로, 원화 환산해서.
다음에 또 물으면 또 같은 말을 해야 했습니다.
문제는 AI가 멍청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이 AI는 "나"를 몰랐던 겁니다. 제가 어떤 종목에 관심 있는지, 어떤 형식을 좋아하는지, 어느 정도 깊이의 분석을 원하는지. 매번 백지 상태에서 시작하니, 매번 범용적인 답만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몇 가지를 바꾸자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AI에게 역할과 정보를 전해준 것입니다.
솔직히 대단한 걸 한 건 아니었습니다.
메모 파일을 하나 만들어 매번 봇이 대화를 시작할 때마다,메모 파일을 먼저 보고 대답하도록 했을 뿐입니다.
"나는 미국 주식과 암호화폐에 투자하고 있다. 매일 아침 내 보유 종목의 시세 변동과 관련 뉴스를 브리핑해줘. 금액은 반드시 원화로 환산해서 보여줘."
그리고 보유 종목 목록을 함께 넣었습니다.
증권 앱 캡처 한 장을 붙이고 "여기 있는 종목들이야"라고 했더니, AI가 종목명과 수량을 알아서 정리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평소처럼 "오늘 어때?"라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이 달랐습니다.
어제까지는 "어떤 종목을 보유하고 계신가요?"라고 되물었던 AI가, 이번에는 바로 종목별 시세와 전일 대비 등락을 정리해서 보여줬습니다. 원화 환산까지 되어 있었습니다.
그 순간 좀 멈칫했습니다. 같은 AI인데, 어제의 그 AI가 맞나 싶을 정도로 대답이 달랐거든요. 설정 파일에 몇 줄 적었을 뿐인데, 마치 제 옆자리에서 한 달쯤 시장을 같이 지켜본 사람이 정리해준 것 같았습니다. 한 줄이 이렇게까지 차이를 만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완벽했던 건 아닙니다.
첫 브리핑은 정보가 너무 많았습니다. 종목마다 시가, 종가, 거래량, 52주 최고가까지 나열해서, 읽는 데만 5분이 걸렸습니다. 아침 출근 전에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었거든요.
너무 길어. 종목당 두 줄로 줄여줘. 전일 대비 등락률이랑 한 줄 뉴스만 있으면 돼.
설정 파일에 이 한 줄을 추가했더니, 다음 날부터 브리핑이 깔끔해졌습니다. 며칠 더 쓰다가 또 고쳤습니다. "등락이 5% 넘는 종목만 별도로 표시해줘." 그랬더니 급등락 종목이 상단에 따로 정리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피드백이 한 줄, 두 줄 쌓이면서 브리핑의 형태가 점점 제가 원하는 모습으로 다듬어져 갔습니다.
2주쯤 되자 브리핑 형식이 완전히 자리를 잡았습니다. 아침마다 열어보는 게 습관이 됐는데, 어느 순간 묘한 감정이 들었습니다. 이 AI는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AI인데, 제가 넣어준 몇 줄의 설명과 피드백이 완전히 다른 존재로 만들었다는 것을요.
마치 신입사원에게 업무 매뉴얼을 한 장 건네줬더니, 몇 주 만에 믿고 맡길 수 있는 담당자가 된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한 달쯤 지나자, 이 AI에게 자연스럽게 말을 걸고 있었습니다. "오늘 시장 분위기 어때?", "이 종목 최근 3개월 흐름 좀 봐줘." 매번 맥락을 설명할 필요 없이, 제 포트폴리오를 아는 상태에서 바로 핵심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오늘 어때?"라는 두 글자만으로 제가 원하는 브리핑이 도착하는 것, 그게 역할 정의가 만들어낸 변화였습니다.
돌이켜보면, 제가 한 건 별로 없었습니다. "너는 투자 브리핑 담당이야"라는 역할 정의, 보유 종목 목록, 그리고 "이건 이렇게 바꿔줘"라는 피드백 몇 번. 그게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물은 마치 몇 달간 같이 일한 주니어 애널리스트가 만든 것 같았습니다. 이게 역할 하나의 힘이었습니다.
AI 업계에서는 이런 역할 부여를 "스킬(Skill)"이라고 부릅니다.
AI에게 "너는 누구이고, 무엇을 잘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설명서인데, 서비스마다 이름도 다르고 방식도 다릅니다. 대표적인 세 가지를 소개하겠습니다.
ChatGPT: Custom Instructions / GPTs
ChatGPT에서는 설정 메뉴의 Custom Instructions에 "나는 어떤 사람인지", "AI가 어떻게 대답했으면 좋겠는지"를 적어둡니다. 한 번 적으면 모든 대화에 적용되는 방식입니다. 좀 더 전문적인 역할이 필요하면 GPTs를 만들 수 있는데, 대화하듯 설명하면 나만의 맞춤형 AI가 만들어집니다. 장점은 진입장벽이 낮다는 것이고, 단점은 하나의 대화에 하나의 역할만 적용된다는 점입니다. "투자 브리핑도 해주고, 영어 교정도 해줘"라고 하면 두 역할이 섞여서 어중간해지기 쉽습니다.
Claude: Projects
Claude에서는 Projects라는 작업 공간을 만들 수 있습니다. 프로젝트 안에 관련 문서를 올려두고, Project Instructions에 규칙을 적으면 그 공간 안에서의 모든 대화에 적용됩니다. ChatGPT보다 한 단계 더 체계적인데, 문서를 함께 참조할 수 있다는 게 큰 차이입니다. 예를 들어 투자 관련 프로젝트를 만들고 포트폴리오 스프레드시트를 올려두면, AI가 그 문서를 참고해서 답변합니다. 다만 프로젝트 단위로 역할이 고정되기 때문에, 여러 역할을 유연하게 조합하기는 어렵습니다.
OpenClaw: SKILL.md
OpenClaw에서는 SKILL.md라는 파일 하나가 스킬 하나입니다. 이 파일에 역할, 규칙, 참고 자료를 적어두면 에이전트가 그대로 따릅니다. 앞의 두 서비스와 가장 다른 점은 모듈화입니다. "주식 시세 조회" 스킬, "뉴스 요약" 스킬, "원화 환산" 스킬을 각각 만들어서 하나의 에이전트에 조합할 수 있습니다. 마치 레고 블록처럼 능력을 끼웠다 뺐다 하는 겁니다. 같은 스킬을 다른 에이전트에 재사용할 수도 있고, 파일이니까 Git으로 버전 관리도 됩니다.
정리하면, ChatGPT는 "한 줄 메모", Claude는 "프로젝트 폴더", OpenClaw는 "레고 블록"에 가깝습니다. 어떤 방식이든 본질은 같습니다. AI에게 역할을 정의해주는 것이죠. 이 글에서는 제가 실제로 사용하고 있는 OpenClaw 기준으로 설명했지만, ChatGPT의 Custom Instructions만으로도 충분히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한 달이 지난 지금,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게 이 브리핑입니다.
증권 앱을 열기도 전에, 어젯밤 시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한눈에 파악이 됩니다.
가끔은 "이 종목 왜 이렇게 빠졌어?"라고 물으면, 관련 뉴스까지 찾아서 설명해줍니다.
예전에는 매번 처음부터 설명해야 했던 AI가, 이제는 제 포트폴리오를 아는 상태에서 대화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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