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밋빛으로 가득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시련 없이 낭만적이기만 한 모험은 없어. 20대든 30대든 편안함을 뒤로하고 미지의 세계에 발을 들인 이상, 빠르든 늦든, 충격받을 일이 팡팡 터지는 건 마찬가지지.
난 최종 목적지인 막데부르크(Magdeburg)에 도착하자마자 언어의 장벽이라는, 해외생활 첫 번째 난관에 부딪혔어. 한국 떠나기 전, 독일 사람들이 영어를 참 잘한다고 들었거든. 근데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더라. 영어엔 나름 자신이 있어서 긴장 따윈 하지 않고 룰루랄라 하며 떠났는데, 이렇게 절망의 늪에 빠질 줄 누가 알았겠어.
막데부르크로 오기 전 이틀간 머물렀던 프랑크푸르트는 독일 도시들 중에서도 큰 도시야. 외국 회사도 많고 외국인도 많지. 어디서나 통하지는 않아도, 영어로 길을 물어 목적지를 찾아갈 수는 있는, 그런 정도지. 거기서 영어 쓰며 편해진 마음으로 수월하게 기차를 타고 막데부르크 중앙역에 도착했어.
온 시내에 ‘내가 드디어 여기 왔소!’라고 알리듯 이민가방으로 드르륵 드르륵 소리를 내며 역 앞 자갈길을 가로질렀는데, 그 경쾌한 바퀴소리에 맞춰 노래를 흥얼거리고 싶을 정도로 긍정 에너지로 가득 찬 상태였어.
근데 낙후된 도시라서 그랬는지, 트램 번호와 종착지가 떠야 하는 알림판이 깨져 있었고 결국 들어오는 트램마다 앞문에서 운전사에게 물어보는 수밖에 없었어. 꽤 많은 트램을 그냥 떠나보냈어. 운전사 아저씨가 대학교 캠퍼스에 안 간다고 그랬거든. 근데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안 가는 게 아니었어. 트램 라인도 몇 없는 곳인데 대학교 캠퍼스에 안 간다는 트램이 어찌 그리 줄줄이 있을 수 있겠어. 독일어 못하는 내가 승차거부를 당한 거지. 하여튼, 또 다른 트램 앞문에서 다시 질문을 했어. 영어를 잘 못할지도 모르는 운전사 아저씨를 나름 배려해서 또박또박 천천히 외쳤지.
“이 트램 대학교 캠퍼스에 가요?”
아저씨가 뭐야? 하는 표정으로 보더라. 그래서 내 목소리가 작아 못 들었나 해서 더 크게 더 천천히 소리쳤어.
“이 트램 대학교 캠퍼스에 가냐고요!”
그랬더니 이 아저씨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더라. 난 친절한 아저씨가 나와서 어떤 트램을 타야 하는지 알려주려는 줄 알았지. 근데 아저씨가 내 이민가방을 발로 차더니 나한테 손가락질을 하면서 막 소리를 지르는 거야.
“!@#%&#!”
독학으로 초급 독일어만 간신히 뗀 내 귀엔 그 아저씨가 하는 말이 하나도 안 들렸어. 그땐 정말 무서웠다.
덩치 큰 아저씨, 게다가 민머리였거든. 그의 얼굴과 반질반질 윤이나는 머리통을 보고 있자니, 독일에 있다는 머리 빡빡 민 네오 나치라는 존재가 불현듯 떠오르면서, 내가 또 영어로 뭐라 하고 이 아저씨가 폭력이라도 휘두르면 난 끝이라는 생각이 드는 거야. 그래서 그가 욕인지 뭔지 모를 소리를 내지르고 다시 트램에 올라 문 닫고 떠나는 걸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어.
그렇게 떠나는 트램을 보면서도 놀란 심장은 여전히 쿵쾅거렸고, 너무 황당하고 무서워서 눈물도 안 나왔어. 그냥 서러워졌을 뿐. 그다음에 오는 트램 운전사에게 똑같은 질문을 하기 두려워져서, 결국 종이로 된 지도를 보고(당시엔 구글맵이 없었으니까. 있었다면 훨씬 쉬웠을 것을!) 그 무거운 이민 가방을 끌고 대략 한 시간 정도를 걸어서 학교 캠퍼스에 도착했어. 트램 타면 10분 걸리는 곳인데.
학교 기숙사에 자리를 잡고 며칠 동네 시찰을 좀 했는데, 이런. 이 동네, 영어가 안 통해도 정말 너무 안 통하더라. 빵집, 맥도날드, 버스표 파는 곳 등 뭘 하든 영어가 도움이 전혀 안 되는 곳 천지였어. 신기한 건 이 동네 아줌마 아저씨들 중에선 영어는 못해도 러시아어를 아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
맞다, 여기는 독일 통일 전에 동독이었지. 그래서 나이 든 사람들이 학교 다녔을 땐 영어 대신 러시아어를 배웠었나 봐. 심지어 대학교 입학처 외국인 담당하는 나이 지긋했던 아주머니도 자신이 독일어, 러시아어, 영어 순서로 잘할 수 있다고 했었어. 어쨌든 내게 이국적인 곳임에는 틀림없었지.
말이 통하지 않는 곳에서 생활한다는 건, 상상만 해도 속 어딘가가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해져. 나와 그들 사이, 철저히 분리된 그 공간이 낯선 언어의 형태를 빌어 내 살갗에 닿는 느낌은 어색하기 그지없거든. 여행을 할 땐 그게 그렇게나 좋았는데 말이야. 여행할 땐 여유롭게 듣고 넘기던 BGM이었던 그들의 언어가, 생활을 하게 되면 꼭 알아들어야 하는 대사가 되어버려.
그렇게 내겐 하루하루 일상을 살아내기 위해 독일어를 공부해야만 하는 상황이 주어졌어. 초반엔 조금 힘들긴 했지만, 그래도 막상 닥치니까 하게 되더라. 영어가 잘 안 통하는 구동독 촌동네에서 지냈다는 게 어쩌면 다행이었던 걸까. 안 그랬으면 난 독일어를 그때처럼 열심히 하지 않았을지도 몰라. 너의 서쪽에서의 경험은 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