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 우선 나의 정체성도 새롭게 만들어나간다. 출판 일을 할 때나 도서관 일을 할 때에도, 자수공예를 할 때에도 그랬다. 그때그때 다른 정체성으로 나를 먼저 만들어나갔다. 온전히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나서야 그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었다. 도서관 일을 할 때에는 매일 아침 인터넷 서점에서 신간 도서를 확인하고 수서 목록을 짰고, 새로운 도서관 프로그램을 기획하거나 이용자에게 편리한 서가 배치를 구상하는 것으로 하루가 돌아갔다. 퇴근 후 지역 도서관을 이용할 때에도 나의 정체성은 이용자가 아니라 학교도서관 사서였고, 학교 아이들이 이 도서관을 어떻게 더 가깝게 이용할 수 있을지 연계 방법을 고민하곤 했다. 몇 년 뒤 자수 공방을 운영할 때에는 길을 가다 예쁜 꽃을 만나면 어떻게 자수로 옮길지를 먼저 생각했고 그것을 어떤 소품을 만드는 수업으로 연결해 나갈지 고민하며 매일의 일과가 내가 만든 새로운 정체성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유튜브라는 일을 새롭게 시작했으므로 나의 정체성은 유튜버여야 했다. 하지만 드라마 유튜버는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콘텐츠를 기획하고 촬영하거나 라이브 방송을 하는 유튜버와는 사뭇 달랐다. 드라마라는 콘텐츠가 이미 존재했고, 그것을 재가공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럼 이번에는 어떤 정체성을 새롭게 만들어나가야 할까.
내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기까지는 일단 배운 대로 무조건 실천해 보는 수련의 기간이 필요하다. 그 기간을 거친 후에야 내가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이 일을 해나가게 될지 윤곽이 잡힌다. 유튜브 수업을 듣고 배운 대로 무조건 해보는 시기가 이제 6개월째에 접어들고 있다. 처음에 유튜브만 하면 돈을 잘 벌 수 있다는 말에 혹하는 마음이 컸던 것도 사실이다. 작업실 월세는 꼬박꼬박 내야 했고 생계를 꾸릴 돈도 필요했으므로. 유튜브를 하기 위해서는 영상에 필요한 대본을 만들어야 하는데, 요즘에는 이러한 대본도 사실 AI의 도움을 많이 받는다. 처음에는 배운 대로 AI의 도움을 받아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걸 수정하기 위해서 시간을 또 써야 하고 내가 생각한 방향대로 AI를 조종하기보다는 그냥 내가 글을 쓰는 편이 내게는 훨씬 수월했다. 대본을 다 쓰고 났을 때의 뿌듯함도 컸다. 현재 방영 중인 드라마를 따라가며 다음 편 예고 영상을 만들 때도 있지만, 좋은 드라마를 세상에 다시 알리고 싶은 마음에 오래전 드라마를 소개하는 영상을 만들기도 했다. 애정을 가지고 있던 드라마를 다시 보고, 주인공들의 대사를 통해 심리를 분석하고 나만의 해설을 하는 유튜브 작업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오래 잊고 살았던 글을 쓰는 재미를 다시 느끼곤 했다. 하지만 아직 확신이 없었다. 유튜브에 도전하겠다고 큰돈을 써 놓고, 쓰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간다는 게 맞을까. 내가 다시, 글을 써도 될까.
그러다가 우연히 가게 된 동네 도서관에서 ‘나의 페미니스트 모먼트’ 특강과 글쓰기 수업이 열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중년의 여성으로 살고 있는 내 삶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리고 혹시라도 그곳에서 내가 다시 글 쓸 용기를 얻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도 아니면 글을 쓰려는 사람들을 만나면 새로운 자극을 받거나 새로운 인연을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작은 기대를 안고 수업을 들었다. 손희정, 이다혜 작가님의 특강을 듣는 건 즐거운 경험이었다. 새로운 강의를 듣고 지적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던 대학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몇 년 전이라고 적어야 하나 햇수를 헤아리다 보니 까마득하다. 불과 몇 년 전 과거인 것만 같은데 벌써 25년도 더 지난 일이라니.
시인이 되기를 꿈꾸며 살았던 적이 있었다. 중학생 시절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마음 둘 곳이 없어 방황하다가 시에 기대었고 오랫동안 시인이 되길 꿈꿨다.국문과를 거쳐 문예창작과를 들어갔고 시에 빠져 살았던 시절이 있었다. 외로움도 가난도, 어떤 불행이 닥쳐와도 상관 없었다. 시만 쓸 수 있다면. 하지만 결국 시인이 되지는 못했다. 시를 공부할수록 시를 잘 모르겠기도 했고, 내가 슬픔을 원료로만 시를 쓰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을 만났고, 행복하게 살겠다고 마음먹은 후로 오랫동안 시를 잊고 지냈다. 여러 번 나의 정체성을 바꿔가며 새로운 꿈을 꾸며 살면서도 시가 아닌 다른 글을 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도서관 수업은 한 주에 한 번씩 열렸고, 특강에 이어 4주에 걸친 심혜진 선생님의 글쓰기 수업이 시작되었다. 심혜진 선생님은 브런치에도 연재했던 글을 모은 <엄마의 물건> <인생은 단짠단짠>등의 에세이를 출간한 작가셨는데, 은유 작가님께 오래 글쓰기를 배우고 글쓰기 강사의 길을 걷게 되셨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수업을 듣는 동안 글로만 만나왔던 은유 작가님의 느낌이 심혜진 작가님께도 느껴졌다. 글쓰기 수업에 참여한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써나갈 수 있게 이끌어주셨고, 합평 시간에는 글을 정확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봐주셨다. 생각해 보니 살면서 내 이야기를 솔직하게 쓰고 발표하는 에세이 수업을 듣는 건 처음이었다. 내게 쌓인 이야기가 이렇게 많았나 싶을 정도로 이야기가 술술 나왔다. 큰 이야기가 아닌 작은 이야기일수록 더 쉽게 글이 나왔다. 뭐든 그냥 쓰면 된다는 말이 위로가 되었고 용기를 내게 했다. 쓸수록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어서 수업이 끝나고 집에 오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냥 뭐든 써보자. 쓰면 더 잘 살 수 있겠다, 싶은 마음이 들었다. 마감이 있어야 더 잘 쓸 수 있다는 선생님의 조언에 브런치 작가 신청을 했다. 그리고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이제 나는 나의 작업실에서 쓰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