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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May 17. 2022

급성불면증의 시작

- 작아진 나-

동부간선도로의 소음이 아침을 깨운다. 머리가 무겁고 몸은 천근만근이다. 무거움으로 아침을 여니 기분이 좋을 리 없다. 몸과 머리의 무거움이 가실쯤이면 늦은 오후가 찾아왔다.


1991년 지방 태생인 나는 서울에 있는 여대에 합격했다. 서울 아이들은 어떤 얘들일까 두려움과 설렘이 앞섰다. 서울 아이들은 얼굴에서 빛이 났다. 패션 감각, 메이크업, 헤어 손질이며 고급스러웠다. 팔다리가 가늘고 연예인 얼굴크기의 과동기도 있었다. 시골에서 갓 상경한 나로서는 그들의 외모가 한없이 부러웠다. 게다가 지방 출신인 동기들조차도 집안 유지들이 많았다. 지방의 평범한 출신인 나는 그들의 외모와 집안 배경에 한없이 작아졌다. 게다가 대학도 전공도 마음에 들지 않아 방황을 하던 시기라 내 얼굴에센 밝음이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사람은 누구나 예쁘고 빛이 나는 건강한 사람을 좋아하지 어둡고 자기고민에 빠져 있는 건강하지 않은 사람은 가까이 하기 싫은 법이다. 대학시절의 나는 남자친구가 없었다. 친구들은 하나같이 잘생기고 좋은 대학에 다니는 남자친구들이 있었다. 대학 축제 때 남친 팔짱을 끼고 보란 듯이 여대 캠퍼스를 누리는 친구들의 모습이 부러웠다. 은근히 키 크고 잘생긴 남친을 자랑하는 듯한 태도에 부럽기도 하고 질투도 났다. 그렇게 부러움과 방황 속에서 4년의 시간을 보낸 후 졸업을 했다. 예쁘고 집안 좋은 동기들은 대기업에 취직을 했다. 20대 중반의 나이, 나는 아직 취직을 못한 상태였고 IMF로 인한 아빠의 갑작스러운 은퇴로 집안 사정은 급격히 나빠졌다. 집에서는 ‘언제 취직할거냐’ ‘서울까지 유학 보내 줬는데 왜 취업을 못하냐’ 등 압박이 심했다. 그때의 나는 인생의 방향을 잃고 어느 방향으로 걸어가야 할지를 모르는 상태였다. ‘너는 할 줄 아는 게 뭐니?’ ‘대학 4년 동안 노력한 것이 있어?’ 매일매일 나에게 비난의 화살을 쏘아대고 있었다. 그렇게 마음의 아픔도 모른 채 하루하루가 흘렀다. 





출처: Desert Man Moon - Free image on Pixabay


 어느 날 부터인가 침대에 누우면 잠이 오지 않았다. 새벽 3시, 4시가 되어도 의식은 선명해지고 생각만 많아졌다. 옅은 하늘 색 벽지, 갈색 옷장, 핑크색 침대 프레임이 달빛에 선명하게 보였다. 동부간선도로에서의 드물게 들리는 차 소리가 더욱 뇌를 깨웠다. 밤은 더 이상 편안하고 휴식을 주는 시간이 아니라 두려움의 시간이 되었다. 잠과의 힘겨루기가 2주가 되었을 때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동네 약국에서 수면유도제를 구입했다. ‘너무 힘드니깐 약 먹고 편하게 자자. 잠들면 모든 근심도 잊어버리게 되니깐’ 이렇게 나 자신을 위로하며 약의 힘을 빌려 잠을 청했다. 




늦은 오전 시간. 전화벨이 울렸다. 비몽사몽의 상태로 수화기를 들었다. 대기업에 취직한 친구로부터의 전화였다. 

“야, 오랜만이다. 잘 지내?” 

“응, 그럭저럭. 너는 어때. 회사 다닐만해?”    

“응, 적응 중이야. 근데 아침 출근 하는 게 좀 힘들어. 일찍 일어나야 돼서”

“그렇구나. 잘 적응한다니 다행이네 ”

“다름이 아니고 우리 희정이랑 다은이랑 언제 한번 같이 볼까? 다은이에겐 연락해 놨어. 졸업했으니 한 달에 한번 정기모임을 갖는 것은 어때?’ 

나는 잠깐 망설였다. 하지만 굳이 안 만날 이유도 없었다.

‘그래, 그렇게 하자’.





그렇게 나의 힘겨운 삶을 감춘 채 친구들과의 정기 모임이 시작되었다. 그 시절엔 명동이 핫 한 장소여서 매번 명동에서 모임을 가졌다. 그리고 아주 가끔은 호텔 라운지에서 모임을 갖기도 했다. S호텔 라운지의 은은한 노란 색 조명, 높은 천고, 느린 째즈 음악은 한껏 밤의 분위기를 더해 주었다. 친구들은 새로 시작된 회사생활에 흥분되어 있었다. 상사이야기며 회사의 잘생긴 남자 이야기 등 이야기가 끊이질 않았다. 친구들의 쏟아지는 수다와 달리 나는 말이 없었다. 나에게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한 시간이 흘렀다.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나는 다시 상념에 빠졌다. ‘다은이는 회사 들어가더니 더 예뻐졌네. 부럽다. 지금의 나는 보잘 것 없는데. 언제쯤이면 내 미래가 보일까?’ 


비오기 직전의 무겁게 내려앉는 습한 공기처럼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은 끝을 모르는 심연으로 내던져지는 기분이었다. 작은 자극에도 소나기가 쏟아질 것처럼 인생의 우기를 통과하는 중이었다. 







마냥 이렇게 회사에 이력서를 넣고 기다릴 수 만은 없었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것도 무의미했다. 아직 인생의 방향이 안 보이니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해보자는 쪽으로 마음의 움직임을 따르도록 했다. 지금 이 상태에서 내가 잘 할 수 있는 게 뭘까? 를 고민하다 그나마 자신있는 영어문법과 독해력이 있으니 영어를 가르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 당시만 해도 중계동은 그렇게 학원들이 많이 자리하지 않았다. 아직 강사로서의 이력이 없기 때문에 큰 학원 보다는 작은 학원에 이력서를 넣었다. 


그러던 중 ‘띠리링, 띠리링’ 

‘여보세요?’

‘네, 거기 --씨 계신가요? 여기 중계동에 있는 어학원인데 이력서 넣으셨죠? 아무 거나 시강 준비해서 오세요?’ 

그렇게 나의 영어강사 생활은 시작되었다. 바쁜 생활 덕분인지 신기하게도 나의 잠은 다시 정상 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20여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다. 20대에 겪었던 단기불면증은 당시에는 고통스러웠던 경험이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때의 경험이 현재 불면증 치료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나에게 내담자를 이해하는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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