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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의기록 May 11. 2019

여행을 낭비하기

마미 마이 아일랜드 : 20일 차 이야기

돌아갈 날이 5일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지금 내가 머무르고 있는 곳은 미바루 해변 도보 10분 거리의 작은 바닷마을.

내가 상상했던 마지막 일주일의 이곳의 나는 매일같이 미바루 비치에 나가 그늘에서 책을 읽거나 네팔 커리를 먹고 하마베노차야의 창가 자리에서 바람과 파도소리를 맞으며 아이스 코히를 마시는 것.

그러다가 어느 날엔 신이 오키나와에 내려와 머물렀다는 세이화우타키에도 가보고, 그 근처 해변공원인 치넨 미사키 코엔에서 엄마와 손을 잡고 걷다 걷다가 지는 노을을 바라보는 것.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3일 내내 회색 하늘과 무채색 바다가 이어지고 있다.

어제부터는 비가 내린다.

종일 비가 약했다가 세찼다가 오락가락하며 내렸고, 날은 뿌옇고 흐려서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나란 인간은 현재 어떠한가.

일반인들에 비해 감정이 굉장히 불안정하고 약해 빠져서 날씨의 영향을 그대로 받고 있는 상태로, 어제까지만 해도 빗소리와 음악소리를 섞어 들으며 긍정 열매를 먹은 어느 만화의 주인공처럼 씩씩하게 앞으로의 삶을 그려놨지만 3일 째인 오늘은 비에 젖은 강아지처럼 쫄딱 처량해져 버렸다.


"이런 날씨라고 집에만 있는 건 이 여행을 낭비하는 거야!"라고 아침 9시가 넘자 엄마를 재촉해 밖으로 나섰지만 결국 1시간도 안되어 집에 돌아왔다. 원래 목적은 오늘 류큐왕국 제일의 신성 지역인 '세이화우타키'를 가는 것이었다. 날이 쨍쨍하지 않더라도, 오히려 오늘 같은 날에 더욱 신성함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며 카메라를 챙겨 나왔는데, 막상 가는 내내 이어지는 길들과 하늘이 너무나 울적해 엄마에게 차를 멈춰달라고 부탁했다. 결국 우리는 세이화우타키 대신 차를 멈춘 근처에서 제일 가까웠던 하마베노차야에 들어섰다.


하마베노차야는 아주 유명한 찻집이다. 바다가 보이는 카페. 바닷가를 향해 나무 창문이 줄지어 이어져있는 분위기가 굉장한 오키나와 남부의 명소. 지브리 스튜디오의 배경음악이 깔리면 아주 잘 어울릴 것 같은 그런 동화 같은 바닷가의 카페. 그래서 평소에 이 곳을 오려면 주차도 힘들고 창가 자리는 매번 웨이팅을 해야 한다. 이 카페 정보를 구글에서 검색하면 10시 오픈이라고 되어있지만, 금, 토, 일에는 8시부터 아침메뉴를 판매한다. 막상 카페에 가더라도 그 인포가 적혀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그렇기에 그걸 알리가 없는 관광객들은 10시나 되어서야 오겠지. (나는 에어비앤비를 이용했는데, 우리 방 호스트가 알려준 고급 정보를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하마베노차야

시간을 보니 9시 15분 정도. 바글거리지 않는 바다가 보이는 카페(심지어 만조)에서 마음을 차분하게 하고 싶어 우리는 그 카페에 들어섰고, 역시나 예상대로 구글맵 정보에 의하면 아직 오픈 시간 전인 그 시간에는 주민으로 보이는 노부부와 일본인 몇 테이블만이 작은 소리로 대화를 하거나 책을 읽고 있었다. 우리는 텅텅 빈 카페에서 마음에 드는 창가 자리를 골라 앉아(!) 브런치 메뉴를 시키고 바다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이 고요함과 차분함이 우울감으로 돌변해 파도를 타고 밀려들어온다. 썰물일 때 봤던 엊그제와는 너무 다르다. 창가자리에 앉으면 시야의 절반 이상이 바다로 꽉 차있다. 분명 날이 좋았다면 예쁜 산호색 바다가 심미적 안정감과 행복감을 함께 가져다주었을 테지만, 오늘 같은 무채색의 바다가 철썩 소리를 내며 창가 가장자리에 보이는 해변가에 파도로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눈을 뗄 수 없게 우울해졌다. 솔직히 말해서 그 우울감이 나쁘지만은 않았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어제의 "한국으로 돌아가면 선생님께 약을 줄여도 될 것 같다고 말해야지!" 외쳤던 나 자신에게 "얘야, 미안하지만 어제 그건 그냥 약효였나 봐. 좋아졌다가 나빠졌다가 하는 그런 부작용 같은 거. 너 하나도 안 좋아졌어"라고 타일러야 하게 생긴 거다. 그리고 때맞춰 10시가 되어가자 한국인 관광객들이 하나, 둘 저 파도처럼 밀려들어왔다. 심지어 나와는 너무 다른 쾌활한 여자 친구 무리들은 그 카페의 적막함과 창 밖 바다의 우울감마저 깰 정도여서 나를 더 암울한 인간으로 만들기 충분했다. 나와 엄마는 서둘러 계산을 하고 카페를 빠져나왔다. 엄마가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어떡할래? 아까 가기로 한 곳 갈래?" 나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졌다. 엄마의 눈을 바라보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든 생각. 오늘 같은 날, 5일밖에 남지 않은 이 여행, 하루쯤 더 낭비하면 어때. "아니, 1층에 내려가서 파도만 조금 더 보다가 집에 가자"


2층 창가 자리에서 쾌활한 아가씨들의 목소리가 1층 모래사장 자리까지 들려온다. 파도소리를 뚫고 들려온다.

"야, 가만히 있어봐. 진짜 개이뻐", "여기로 와봐, 개이쁘게 나와"

이렇게나 무채색의 하늘과 바다인데 도대체 뭐가 '개'이쁘다는 거지? 바라보는 마음이 달라서 그런 건가?

신기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고, 나도 '개'이쁘게 바라봐야지 노력하다가 결국 집으로 돌아왔다.

이번 여행을 하는 동안 생각해봤는데, 나는 여행을 그다지 좋아하는 건 아닌 것 같다. 막 가고 싶은 나라도 별로 없다. 세계 각국의 랜드마크를 보는 건 큰 관심도 없고, 그 앞에서 뭔가 연출을 하며 내 사진을 찍어 남기는 것은 오글거릴 정도다. 이미 훌륭한 그림을 나로 인해 망치고 싶지 않달까. 그렇다면 나는 뭘까. 나는 왜 안정되고 정착한 생활을 지루해하는 것일까. 나는 그저 내가 좋아하는 것을 보러 떠남을 좋아하는 것, 뿐 인 것 같다. 이번 여행의 초반을 생각해보면 사색의 시간이랄 건 전혀 없이 그저 내내 즐겁고 들떴고 설레었고 행복했고 감동스럽기만 했던 것 같다. 내겐 시간이 필요하다. 여행을 며칠쯤 낭비해도 되는 그런 여유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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