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변의 시대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믿음의 세기이자 의심의 세기였으며, 빛의 계절이자 어둠의 계절이었다. 희망의 봄이면서 곧 절망의 겨울이었다. 우리 앞에는 무엇이든 있었지만 한편으로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는 모두 천국 쪽으로 가고자 했지만 우리는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다.
- 찰스 디킨스, 두 도시 이야기
2000년대 초, 새로운 밀레니엄의 여명은 그야말로 격변의 시기였습니다. 모든 것이 가능해 보이는 꿈의 시대였지만, 동시에 그 꿈이 산산이 부서지는 좌절의 순간들로 가득했습니다. 혁신과 창의성이 넘쳐나는 새로운 시대의 기운이 솟구쳤지만, 과거의 영광을 고수하려는 완고한 힘 또한 여전히 강하게 맞서고 있었습니다. 무한한 가능성이 열린 듯했으나, 어떤 성공도 보장할 수 없는 불확실성의 시대였습니다. 우리 모두가 미래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그 미래가 어떤 모습일지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기회의 시대였고, 불확실성의 시대였습니다. 혁신의 물결이 넘실대는 한편, 의심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때였습니다.
이러닝은 이러한 시대의 산물입니다. 교육의 변방에서, 그리고 IT의 주변부에서, 이러닝은 조용히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주류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었지만, 동시에 어떤 제약도 받지 않는 자유로움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기에 실패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고,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기에 어떤 혁신도 가능했습니다. 소외감과 창조의 자유를 동시에 누리는 역설의 시간이었습니다. 교육계에서는 이단아 취급을 받았지만, IT 업계에서는 미지의 영역으로 여겨졌습니다. 누구도 미래를 예측할 수 없었지만, 바로 그 불확실성이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었습니다. 이러닝은 이처럼 모순된 시대정신 속에서, 교육의 변방에서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그 뿌리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아스팔트 틈새에서 피어나는 들꽃처럼, 역경 속에서도 끈질기게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이러닝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곳에서, 아무도 기대하지 않은 방식으로, 교육의 미래를 조용히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한반도에 체계적인 문화가 자리잡기 시작한 시기부터 교육은 신분 상승의 유일한 통로로 인식되어, 모든 사회 구성원의 주요 관심사였습니다. 해방 이후 진행된 토지개혁은 경제적 신분 격차를 완화시켰고, 이는 교육에 대한 열망을 더욱 고조시켰습니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의 급속한 경제 성장은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불균형을 야기했습니다. 그러나 1980년대의 민주화 열풍은 중산층의 저변을 확대하고 경제적 여유를 증대시켰으며, 이는 교육에 대한 관심을 극대화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와 고조된 교육열은 새로운 교육 방식에 대한 수요를 창출했고, 이러닝이라는 혁신적인 교육 형태의 등장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전통적인 교육 방식의 한계를 극복하고 보다 많은 이들에게 양질의 교육 기회를 제공하고자 하는 사회적 요구가 이러닝의 발전을 추동한 것입니다. 이러닝은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교육의 접근성과 효율성을 높이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한국 사회는 영어 학습 열풍에 휩싸였습니다. "누구나 영어 한마디는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퍼져 영어 공부가 유행처럼 번졌습니다. 당시는 인터넷은커녕 개인용 컴퓨터조차 보편화되지 않은 시절이었습니다. 영어 학습의 주된 방법은 책과 카세트테이프를 활용하는 것이었습니다.
1982년, 오성식 강사의 '생활영어' 시리즈가 출시되어 선풍적 인기를 끌었습니다. 당시 월 평균 가계 소득이 약 40만원이던 시기에 3만 5천원이라는 꽤 고가임에도 불구하고, 자녀 교육에 열성적인 부모들은 월부로라도 이 카세트테이프와 책 세트를 구입했습니다. 1985년까지 누적 판매량 100만 세트를 돌파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습니다.
90년대 초부터 각 가정으로 컴퓨터가 보급되기 시작했습니다. 1994년 가구당 컴퓨터 보유율이 약 20%였던 것이 1999년에는 50%를 넘어섰습니다. 90년대 말부터는 인터넷이 가정으로 연결되기 시작했는데, 1998년 말 인터넷 이용자 수가 310만 명이었던 것이 2000년 말에는 1,904만 명으로 급증했습니다. 이 시기 컴퓨터와 인터넷을 처음 접한 사람들은 이를 다양한 용도로 활용했습니다. 1998년 출시된 스타크래프트는 대표적인 온라인 게임으로, 2000년까지 국내에서만 약 450만 장이 판매되었습니다. PC방은 1998년 100여 개에 불과했으나 2001년에는 2만 3천여 개로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주식 투자도 인터넷을 통해 대중화되었습니다. 1999년 코스닥 지수는 연초 대비 약 400% 상승하며 '동학 개미 운동'이라 불릴 정도로 개인 투자자들의 참여가 활발했습니다. 이 시기 온라인 증권거래 비중은 1998년 5%에서 2000년 55%로 급증했습니다.
자기 계발 도구로서의 컴퓨터 활용도 증가했습니다. 2000년 기준으로 사이버 대학에 등록한 학생 수가 약 1만 5천 명에 달했으며, 온라인 어학 학습 시장 규모는 약 1,000억 원에 이르렀습니다. 한글과컴퓨터의 '한컴 타자 연습' 프로그램은 1998년 출시 이후 2000년까지 약 200만 장이 판매되었습니다.
이처럼 인터넷과 연결된 컴퓨터는 게임, 투자,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인의 생활을 크게 변화시켰습니다. 이는 향후 한국이 IT 강국으로 발돋움하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 학력고사 체제 하에서 대학 입시에 실패한 많은 학생들이 재수를 선택했습니다. 1993년 통계에 따르면, 대학 입학생 중 재수생의 비율이 약 30%에 달했습니다. 이는 재수가 당시 얼마나 보편적인 선택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시골 출신 학생들의 경우, 대부분 서울이나 부산 같은 대도시로 향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학원 수업을 듣기 위함만이 아니라, 같은 목표를 가진 또래들과의 경쟁 환경에 자신을 노출시키기 위함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집단적 학습 환경은 재수생들에게 심리적 지지와 동기부여를 제공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학원 강사들의 전문성에 있었습니다. 학교 교사들과는 달리, 학원 강사들은 입시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문제 풀이 기술과 시험 전략에 특화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의 수업 방식은 효율성에 초점을 맞추어, 학생들이 단기간에 점수를 올릴 수 있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서울의 대성학원은 1975년 설립 이후 1980년대에 폭발적으로 성장했으며, 1990년대 초반에는 연간 수강생이 10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이러한 집중적인 훈련을 통해, 많은 학생들은 1년 정도의 기간 동안 문제의 깊은 이해 없이도 정답을 맞힐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방식의 교육은 장기적으로는 깊이 있는 학습과 창의적 사고 능력 개발을 저해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지만, 입시라는 절실함을 가진 학생들에게는 이것이 큰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사교육 중심의 입시 문화는 한국 교육의 특징적인 모습으로 자리 잡았고, 1994년 수능 제도 도입의 배경이 되었습니다. 또한, 이후 온라인 교육 시장의 성장에도 큰 영향을 미쳤으며, 2000년대 초반 메가스터디와 같은 온라인 교육 기업들의 성공을 이끌어내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2000년대 초, 메가스터디와 정진학원(후의 JNJ에듀)은 온라인 교육 시장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였습니다. 메가스터디는 손사탐을 비롯한 스타 강사 영입으로 시장을 공략했고, JNJ에듀는 기존 오프라인 강사와 새로운 온라인 강사를 활용하는 전략을 펼쳤습니다. 2002년 7월, JNJ에듀의 무료 동영상 강의 서비스 중단 사건은 시장 구도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2003년 기준 메가스터디의 매출은 729억 원, JNJ에듀는 약 500억 원을 기록했습니다. 메가스터디가 동영상 강의에 집중한 반면, JNJ에듀는 온/오프라인 통합 학습을 제공했습니다. 결국 우수 강사진 확보에 성공한 메가스터디가 경쟁에서 우위를 점했지만, 이 두 회사의 경쟁은 민간 온라인 교육 시장의 급속한 성장을 견인했고, 다른 오프라인 학원들의 온라인 진출을 촉진했습니다. 또한, 유명 강사의 온라인 강의가 전국에서 수강 가능해지면서 교육의 지역 격차 감소에 기여했고, 이는 2004년 EBS 수능강의 도입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한편, IMF 외환위기 이후 고용 불안정이 심화되면서, 안정적 직업으로 인식된 공무원에 대한 선호도가 크게 증가했습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실업률이 1997년 2.6%에서 1998년 7.0%로 급증한 가운데, 9급 공무원 시험 응시자 수는 2000년 약 17만 명에서 2005년 약 20만 명으로 증가했습니다. 이에 따라 공무원 수험시장도 급성장하여, 2000년대 초반 관련 사교육 시장 규모는 연간 5,000억 원 이상으로 추정되었습니다. 동시에 인터넷 이용률이 2000년 44.7%에서 2005년 72.8%로 증가하면서 온라인 교육 시장이 부상했고, 이는 지방 수험생들에게도 양질의 교육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이 시기에 이지엠피, 고시마넷, 에듀윌 등의 온라인 교육 기업들이 급성장했으며, 예를 들어 에듀윌의 경우 2000년 매출 20억 원에서 2005년 150억 원으로 크게 성장했습니다. 정부의 공공부문 일자리 창출 정책도 공무원 시험에 대한 관심을 더욱 높이는 요인이 되어, 2000년대 초반 공무원 시험 준비 열풍과 관련 수험시장의 급성장을 이끌었습니다.
이러한 흐름과 더불어, 2000년대 초 저금리 기조와 부동산 가격 상승으로 부동산 시장이 활성화되면서 공인중개사에 대한 관심이 크게 증가했습니다. 국토교통부 자료에 따르면, 공인중개사 시험 응시자 수는 2000년 약 10만 명에서 2005년 약 22만 명으로 2배 이상 증가했습니다. 이는 IMF 외환위기 이후 제2의 직업을 준비하려는 사회적 분위기와 맞물려 자격증 취득 열풍의 일환이었습니다. 동시에 인터넷 이용률이 2000년 44.7%에서 2005년 72.8%로 급증하면서 온라인 교육 시장이 성장했고, 에듀윌, 랜드프로, 박문각 온라인 등이 공인중개사 온라인 강의 시장에 진출했습니다.
2000년대 초반, 한국의 이러닝 시장은 두 가지 흐름으로 발전했습니다. 하나는 수능, 공무원, 각종 자격증 시험 준비를 위한 시장으로, 이는 사회적 수요에 의해 자연발생적으로 성장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정부 주도의 정책에 의해 형성된 시장이었습니다.
김대중 정부의 IT 정책은 이러한 정부 주도 이러닝 시장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정부는 '사이버 코리아 21' 계획을 통해 초고속 정보통신망을 전국적으로 구축하고, 인터넷 보급률을 획기적으로 높였습니다. 또한 전자정부 추진, 국민 정보화 교육, IT 산업 육성, 디지털 디바이드 해소, 전자상거래 활성화 등 종합적인 IT 정책을 실시했습니다. 이는 한국을 세계적인 IT 강국으로 발전시키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IT 인프라와 정책을 바탕으로, 정부는 두 가지 핵심 정책을 통해 이러닝 시장 형성을 주도했습니다. 첫째는 1999년 도입된 고용보험 환급제도였습니다. 이 제도는 기업이 근로자에게 제공하는 이러닝 교육 비용을 환급해주는 정책으로, 기업 교육 분야에서 이러닝의 급속한 확산을 가져왔습니다. 둘째는 2001년 평생교육법 개정으로 도입된 사이버대학 제도였습니다. 이는 온라인 고등교육의 길을 열어 직장인, 주부, 은퇴자 등 다양한 계층의 성인 학습자들에게 새로운 교육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이 두 정책은 한국 이러닝 산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고용보험 환급제도는 기업 이러닝 시장을 창출하고 확대했습니다. 기업들은 비용 부담 없이 직원 교육을 실시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이러닝 콘텐츠 개발 산업과 학습관리시스템(LMS) 시장의 성장으로 이어졌습니다. 2000년 약 500억 원이던 기업 이러닝 시장 규모는 2005년 약 3,000억 원으로 급성장했습니다.
고용보험 환급제도를 통해 많은 기업들이 탄생되었는데 그중 가장 탁월한 성과를 거둔 기업은 크레듀였습니다. 크레듀는 2000년 삼성그룹 계열사 직원 교육을 위해 설립되었으나, 곧 외부 기업 교육 시장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했습니다. 고용보험 환급제도의 영향으로 기업들의 이러닝 수요가 급증하자, 크레듀는 플래시 기반의 인터랙티브한 콘텐츠 개발에 주력했습니다. 2004년에는 연간 300개 이상의 과정을 개발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었고, 2005년에는 매출 410억 원을 달성하며 기업 이러닝 시장의 선두주자로 자리잡았습니다.
크레듀 외에도 1999년 설립된 휴넷, 2000년 설립된 사이버MBA와 같은 벤처기업뿐만 아니라, 삼성SDS 교육사업부에서 2001년 분사한 멀티캠퍼스, KT 자회사인 KT이캠퍼스, 메가스터디 내 신사업 조직인 메가스터디법인사업부, 그리고 영어 어학원의 기반을 가지고 2001년 출범한 YBM시사닷컴(현 YBM넷) 등이 있었으며, 이들은 각자의 특화된 분야와 기존 사업 기반을 바탕으로 급성장했던 고용보험 환급시장이 형성한 이러닝 시장에서 경쟁했습니다. 이 시기는 기업 이러닝 시장이 급격히 성장하던 때로, 각 업체들은 대량의 품질 높은 콘텐츠를 빠르게 제작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며 한국 이러닝 산업의 양적, 질적 성장을 이끌었습니다. 이들 기업은 고용보험 환급 과정에 특화된 표준화된 개발 프로세스를 구축하고,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 협업하여 대량의 품질 높은 콘텐츠를 빠르게 제작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었습니다.
이로 인해 제도권 내의 이러닝 서비스와 민간 이러닝 서비스 간 콘텐츠 제작 방식이 뚜렷이 구분되기 시작했습니다. 1999년 도입된 고용보험 환급제도 하의 콘텐츠나, 2004년부터 시작된 사이버 가정학습 등 공교육 분야의 콘텐츠는 상호작용성을 강조했습니다. 반면, 메가스터디나 2004년 시작된 EBS 수능 강의와 공무원, 공인중개사 강의는 유명 강사의 강의력에 주로 의존했습니다. 이는 각각의 목적과 대상에 따른 차이였습니다. 전자는 직무 교육이나 보편적 학습을 위해 교육학의 기본 원리에 집중했고 후자는 대학 입시와 시험합격이라는 학습의 효율성에 입각한 명확한 목표를 겨냥했기 때문입니다.
2000년대 초반은 이러닝이 탄생하고 발전하는 격변의 시기였습니다. 새로운 기술과 인터넷의 급속한 보급은 이러닝의 토대를 마련했고, 한국 사회의 높은 교육열과 변화하는 교육 환경은 이러닝의 발전을 가속화했습니다. 메가스터디와 같은 기업들은 온라인 교육 시장을 선도하며, 교육의 접근성을 혁신적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정부의 IT 정책과 고용보험 환급제도는 이러닝 산업의 성장을 촉진했으며, 다양한 기업들이 이를 통해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과 사례들은 이러닝이 단순한 기술적 혁신을 넘어 교육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자리잡는 과정을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