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원의 하루는 아침 햇살이 창문 너머로 스며드는 소리 없는 시작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침대 곁의 시계는 늘 같은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7시 15분. 더 자지 않아도 되는 몸은 혼자서 깨어났고, 그녀는 느릿한 손길로 이불을 걷어냈다.
주방에는 식지 않은 공기가 맴돌았다. 찬장의 손잡이는 약간 헐거워져 있었고, 설거지가 마르면서 남긴 물 얼룩이 싱크대 가장자리에 묻어 있었다. 커피포트는 오래된 습관처럼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물을 끓이며 천천히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파트 단지 사이로 늘어진 가로수와 군데군데 주차된 차들, 그 모든 것이 하나같이 침묵 속에 갇혀 있는 듯했다.
퇴직 후의 삶은 정리된 세계와 같았다. 단정하게 정돈된 집 안, 조금의 어지러움도 허용되지 않는 깔끔한 공간은 그녀가 오랜 시간 가꾸어온 성격의 연장이었다. 하지만 그 정돈된 질서 속에는 고요한 공허가 스며들었다.
퇴직 후의 혜원은 늘 책상 위에 쌓아둔 메모지와 노트북 사이에서 무언가를 정리하거나, 식탁에 앉아 천천히 혼자 밥을 먹는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집 안은 어두웠다. 커튼을 열어도 빛은 오래 머물지 않았고, 머물더라도 그것은 마치 빛이라기보다는 옅은 그림자처럼 보였다.
딸은 이제 자신의 자리에서 분주히 살고 있었다. 그녀의 방은 오랜 시간 동안 그대로 남아 있었다. 책상 위에는 정리된 책들과 오래된 연필꽂이가, 벽에는 고등학교 시절의 메달과 트로피가 그대로 걸려 있었다. 그녀는 가끔 방을 지나며 책상 위를 손끝으로 쓸어내렸다. 먼지조차도 얇게 쌓이지 않는 공간이었다.
퇴직 후의 일상은 평온했지만 동시에 견디기 힘들었다. 혜원은 스스로를 자주 다그쳤다. ‘이 정도면 괜찮아. 이만하면 충분해.’ 하지만 아무리 스스로를 다독여도 하루가 끝나갈 즈음, 그 고요함은 다시 그녀를 찾아왔다.
그날도 다르지 않은 날이었다. 아침 햇살은 조금 더 희미했고, 바람은 차가웠다. 그녀는 천천히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딸과 마지막으로 함께 보낸 시간들, 그녀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들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런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작은 소리였다. 그녀는 한동안 그 소리를 듣고도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두 번째로 울리는 소리는 더 묵직하고 분명했다.
혜원은 천천히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손을 문고리에 얹으며, 방문객이 누구인지 떠올리려 애썼다. 그러나 예상하지 못한 목소리가 그녀를 맞이했다.
“혹시 이분의 어머니 되십니까?”
경찰이었다. 문 앞에는 두 명의 경찰관이 서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차갑게 얼어 있었고, 그 차가움은 그녀의 심장으로 곧바로 흘러들었다.
그들은 말을 천천히 꺼냈다. 그러나 그녀의 귀에는 단어들이 하나씩 끊어져 들려왔다. “고인의… 따님… 자살…”
그녀는 그 말을 이해하는 데 한참이 걸렸다. 한 글자씩 풀어가듯, 그들이 전한 말을 머릿속에서 조합했다. 그리고 그 의미가 완전히 다가왔을 때, 그녀의 세상이 멈추는 듯했다.
그 순간 그녀는 문턱에 얼어붙었다.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경찰관들이 그녀를 부축하려 했지만,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그 자리에 서서 바닥을 바라보았다.
머릿속은 텅 비어 있었다. 딸의 이름과 자살이라는 단어가 충돌하며 만들어낸 공허한 진동이 그녀를 뒤덮었다. 그녀는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목에서 나온 것은 무언의 숨소리뿐이었다.
바람이 불었다. 열린 문틈 사이로 들어온 찬 공기가 그녀의 뺨을 스쳤다. 그러나 그 바람조차도 감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경찰관들은 차분히 그녀에게 필요한 정보를 전달했지만, 그것은 그녀에게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그녀의 주변은 이미 무너져 있었다.
경찰관들이 떠나고, 집 안에는 깊은 적막이 감돌았다. 그녀는 조용히 문을 닫고 돌아섰다. 시계는 여전히 8시를 지나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녀의 시간은 멈춰버린 듯했다.
딸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방 안은 여전히 깨끗하고 정돈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고요함은 더 이상 평온하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그녀를 집어삼키려는 거대한 침묵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천천히 책상 앞에 앉았다. 책상 위에 놓인 사진 속의 딸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진 속의 미소는 너무도 평온했다. 그녀는 사진을 손끝으로 만지며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그날 이후, 혜원의 집 안은 더 깊은 적막 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녀는 방 안에 남겨진 딸의 흔적을 하나씩 쓸어보며, 딸이 떠난 그 이유를, 그 공백을 헤아리려 애썼다.
혜원은 딸의 어린 시절을 떠올릴 때마다, 그녀가 유난히 종이를 다루는 손끝이 섬세했던 기억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딸은 어린 시절부터 말로 표현하기보다는 글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곤 했다. 초등학교 시절, 그녀는 가끔 책상 위에 작은 노트를 펼쳐놓고 혼자만의 세계를 만들어가곤 했다. 글씨는 또박또박했지만, 어딘가 다소간의 긴장이 서려 있었다.
“왜 이렇게 써?” 혜원이 묻자, 그녀는 짧게 대답했다. “내 생각이 지워질까 봐.”
처음에는 그냥 어린 아이의 사소한 습관이라 여겼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가 글을 쓰는 데 유난히 많은 시간을 들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의 글에는 단순한 생각이 아니라, 어떤 논리와 구조가 담겨 있었다.
중학교에 들어간 딸은 교내 토론 대회에 참가했다. 대회는 팀별로 진행되었고, 주제는 ‘기술 발전이 인간 관계에 미치는 영향’이었다. 딸은 팀의 주장과 반론을 정리하며 중심 역할을 맡았다. 그녀는 단순히 주장만을 나열하지 않았다. 그녀의 논리는 상대방의 주장을 해체하고, 그것을 설득력 있게 반박하며 점점 더 완성된 형태로 발전했다.
혜원은 대회 당일, 객석에서 딸을 바라보았다. 딸은 다른 학생들과 달리 말을 아꼈다. 그러나 그녀가 입을 열었을 때, 방 안의 공기가 달라졌다. 그녀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또렷했다. 상대방 팀이 던진 질문에 그녀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기술이 인간의 관계를 단절시킨다는 말은 그 자체로 모순입니다. 기술은 새로운 형태의 연결을 가능하게 했으며, 그 연결은 우리가 과거에 상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공동체를 형성합니다. 중요한 건, 기술을 사용하는 우리의 태도와 선택입니다.”
그녀의 말에 심사위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팀은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딸은 최우수 발언자로 선정되었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딸은 혜원의 눈을 피하며 말했다.
“엄마, 너무 잘난척했나?”
혜원은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난척이라니. 넌 네 목소리를 정확히 필요한 순간에 썼어.”
고등학교 시절, 딸은 스스로 법학 동아리에 가입했다. 그녀는 법을 단순히 규칙으로 보지 않았다. 법이 인간의 선택과 행동,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가는 사회의 구조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
한 번은 동아리에서 주최한 모의재판에서, 딸은 피고 측 변호사 역할을 맡았다. 사건은 가상의 사고였지만, 딸은 피고의 심리를 분석하고, 법률을 활용해 그들을 방어하는 논리를 만들어냈다. 그녀는 단순히 법 조항을 나열하지 않았다. 그녀의 변론에는 인간적 설득과 공감이 담겨 있었다.
“피고는 법을 어긴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행동의 이면을 본다면, 이 사회가 그들에게 선택지를 주지 않았다는 점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법은 인간을 판단하지만, 인간 또한 법을 통해 다시 기회를 얻어야 합니다.”
그녀의 말은 청중을 매료시켰고, 심사위원들 역시 그녀의 변론에 감탄했다. 그녀의 팀은 모의재판에서 우승했다.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딸은 학문에 몰두하며 논리와 설득을 깊이 연마했다. 몇년에 걸쳐 사법시험과 행정고시에 합격한 후, 그녀는 공직자로서 법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했다. 그녀는 법을 단순히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도구로 보지 않았다. 그것은 사람들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는 힘이기도 했다.
혜원은 가끔 딸이 주도하는 회의를 담은 동영상을 찾아보곤 했다. 화면 속의 딸은 단정한 옷을 입고, 차분한 목소리로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조율하며 중심을 잡아갔다. 그녀는 언제나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었다.
“엄마, 내가 잘하고 있는 걸까?” 딸은 가끔 물었다.
혜원은 대답 대신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너는 언제나 너만의 길을 가고 있잖아. 괜찮아.”
혜원은 가끔 딸의 방에 들어가 조용히 앉아 있었다. 책상 위에는 그녀가 정리한 메모와 책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모든 것이 그녀의 성격을 닮아 있었다. 질서 있고, 논리적이며,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모습.
그 방에 앉아 있으면,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그 목소리는 언제나 조용했지만, 그녀를 설득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녀는 그 목소리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세상을 바꾸는 사람이 되었다.
딸의 죽음은 혜원을 흔적 없이 삼켜버릴 것 같았다. 그러나 그 고통 속에서도 혜원은 끝없이 묻고 있었다. 왜? 그녀는 왜 스스로의 생을 멈추어야 했는가? 아무리 돌아보아도 그녀의 삶에는 균열 하나 없었다. 딸은 성공한 변호사였고, 공직자로서도 모두에게 인정받았다. 그녀의 동료들은 그녀를 존경했고, 그녀는 늘 중심에 있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녀를 그토록 끝으로 몰아넣었단 말인가?
혜원은 기억 속에서 단서를 찾으려 했다. 딸이 어린 시절부터 어른이 되기까지의 모든 순간을 더듬어보았다. 과학 경시대회를 준비하며 밤늦게까지 실험실에 남아있던 그녀의 얼굴, 시험을 준비하며 침착하게 책장을 넘기던 그녀의 모습. 그 모든 장면 속에서 그녀는 흔들림 없이 단단했다. 적어도 혜원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하지만 그 단단함 속에 무언가가 숨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딸은 항상 주변에서 ‘완벽한 사람’으로 불렸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듯 보였고, 모든 일을 능숙하게 해냈다. 사람들은 그녀를 칭찬했고, 그녀의 이름은 늘 성공의 동의어처럼 쓰였다. 그러나 혜원은 이제야 깨닫는다. 그 완벽함의 무게는 얼마나 컸을까? 그녀가 그 무게를 홀로 견디기 위해 얼마나 고독해야 했을까?
혜원의 시선은 예전 학생시절 딸이 지냈던 방을 향했다. 깔끔하게 정돈된 책상 위에는 몇 개의 노트와 펜이 놓여 있었다. 서랍 안에는 딸이 남긴 메모들이 있었다. “할 수 있다.” “오늘은 조금 더.” 이런 문장들은 그녀가 얼마나 스스로를 몰아붙였는지 보여주는 증거처럼 보였다. 그녀는 항상 자신에게 기대를 걸었고, 그 기대를 배신하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끝없는 싸움이 아니었을까?
혜원은 한순간 딸의 행동과 말 속에 스쳐 지나갔던 신호들을 떠올렸다. 몇 달 전, 저녁 식사 자리에서 딸은 자신이 맡고 있는 프로젝트에 대해 이야기했었다. “요즘 많이 바쁘지?“라는 혜원의 물음에 딸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 뒤에는 피곤함이 묻어 있었다. “괜찮아. 일이 많을 뿐이야.” 그녀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 말 속에는 작은 균열이 숨어 있었던 듯했다. 왜 그때 혜원은 그 균열을 보지 못했을까?
또 다른 날, 딸은 “엄마, 내가 잘하고 있는지 가끔 헷갈릴 때가 있어.“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혜원은 단순한 피로라고 생각했다. 딸은 늘 그랬다. 조금 지친 듯 보이다가도 언제나 자신의 일을 훌륭히 해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야 혜원은 그 말 속에 담긴 무언가를 알아차린다. 그것은 지친 사람의 고백이었다. 하지만 혜원은 그것을 외면했다.
딸은 스스로를 닫아두는 사람이 아니었다. 적어도 혜원은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보니, 그녀는 늘 자신만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것 같다. 그녀는 혜원에게 자신을 보여주는 법이 없었다. 그녀의 내면 깊숙한 곳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방이 있었던 듯했다. 그 방 안에서 딸은 혼자 모든 것을 감당하고, 모든 것을 견뎌내려 했던 것이 아닐까?
혜원은 딸의 방 한구석에 놓인 오래된 나무 상자를 발견하고 조심스럽게 열었다. 서랍 깊숙이 숨겨져 있던 것처럼 상자 안에는 작은 공책과 스마트폰 메모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방 안에는 오후 늦은 햇살이 기울며 바닥에 길게 드리운 그림자가 일렁이고, 텅 빈 벽에서 반사되는 은은한 빛이 마치 숨죽인 시선처럼 혜원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공책의 페이지를 넘겼다. 손끝이 종이를 스치는 느낌이 까슬했고, 순간 가슴 한구석에서 뜨거운 덩어리가 꿈틀거렸다. 낯설게 긴 문장들과 숫자, 그리고 딸의 필체로 적힌 단서들이 불규칙한 호흡처럼 페이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엄마, 내가 잘하고 있는 걸까?’ ‘나는 더 이상 나를 찾을 수 없어…’ 이런 문장들을 마주한 순간, 혜원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마치 소리가 없는 굉음이 머릿속을 스쳐 가는 듯, 그녀는 잠시 숨 쉬는 법을 잊었다.
손이 떨려 공책 귀퉁이를 잡고 있던 손가락이 살짝 미끄러졌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뜨며, 지금 방 안에 흐르는 공기의 농도를, 낡은 책장 속 먼지 냄새를, 창문 틈새로 스며드는 차가운 바람을 다시금 느끼려 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제대로 인식되지 않았다. 머릿속은 하얀 소음으로 가득했고, 귓가에선 딸의 목소리가 부서진 메아리처럼 반향했다.
‘왜, 왜 몰랐을까.’ 혜원은 제자리에서 주저앉을 듯 가슴을 움켜쥐었다. 눈앞의 글자들이 번져 흐릿해지는 순간, 딸의 마지막 외침이 시간의 장막 뒤에서 손을 뻗어 혜원의 목덜미를 붙잡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제서야 혜원은 딸이 살아 있을 때 느꼈을 수많은 감정의 결을, 지금 이 순간에야 마주하는 자신을 깨달았다. 기록 속 문장 하나하나가 작은 파편처럼 그녀의 심장에 박혀 들어왔고, 혜원은 그 통증에 할 말을 잃은 채, 오래된 방 안에서 조용히 무너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