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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하 May 10. 2020

우리 사이, 이 정도면 인연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

순탄치 않았던 독일어와의 첫 만남, 하지만 나는 이제 독일어를 사랑해



언제부터였을까, 독일어와 만남은. 차근차근 시간을 더듬어 보니 벌써 2년이 훌쩍 넘은 것 같다. 우리의 첫 만남이 순조로웠던 건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별로 내키지 않는 만남이었다. 


오랜 시간 동안 유럽을 동경하고 좋아했던 나는 고등학생 시절부터 교환학생을 꿈꿔왔었다. 대학교에 입학한 후 2년 동안은 전공 공부에만 매진했다. 전액 장학금을 받아서 유럽에 가고야 말겠다고 다짐했으니까. 


그렇게 스물두 살 봄, 독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왜 독일이었냐고 묻는다면 영어가 비교적 잘 통하는 나라였고, 학생복지가 좋아 공부하기 좋은 환경이었기 때문이다. 치안도 좋았고 생활 물가도 저렴했다. 평소 헤르만 헤세 같은 독일 출신 작가를 좋아했고, 클래식을 좋아했기에 클래식의 고장 독일에 간다는 일은 꽤나 설레는 일이었다. 





그러나 독일어엔 도통 정이 안 갔다. 출국 전까지 독일어를 열심히 공부하고 가리라 마음먹었지만, 알파벳만 익히고 회화 어플로 단어만 깨작깨작 외웠을 뿐이었다. 


독일에 도착하고 현지 학교에서 매일매일 독일어 수업을 들었지만 영 흥미가 생기질 않았다. 영어도 잘하는 편이 아니라서 조바심이 나는데, 독일어까지 공부하자니 시간을 낭비하는 것 같았다. 현재 듣고 있는 수업도 모두 영어로 진행되는데, 꼭 독일어를 공부해야만 하는 걸까?





독일어를 공부하지 않은 대가는 혹독했다. 머나먼 타지에서 그 나라 말도 못 하는 외국인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인정되지 않았다. 장을 보러 들린 마트는 물론이고 우체국에 소포를 부치러 갈 때도, 음식점에서 주문을 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영어로 질문을 할 때면 불쾌한 표정을 짓고 시종일관 독일어로 대답하는 사람도 있었다. 학교에서 만난 독일 친구들은 대부분 영어를 잘했기에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학교 밖에선 매일매일 어려움에 부딪혀야 했다.


점점 마음의 문을 닫았다. 이 곳은 나와 맞지 않아 - 독일이 점점 싫어졌다. 불친절하고 재미없고 딱딱한 이 나라가 싫었다. 한국에 돌아와서야 깨달은 사실이지만, 그건 내가 독일어를 열심히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독일어를 더 잘했더라면 난 그곳에서의 삶을 더 사랑할 수 있었겠지.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날엔 가지고 있던 모든 독일어 교재를 쓰레기통에 버려버렸다. 이젠 독일에 올 일도 없을 테니 마주칠 일도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가는 곳마다 독일어가 보였다. 우연히 펼친 잡지에서, 서점에서, 카페 벽면에 걸려있는 포스터에서. 무슨 뜻인진 잘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이 독일어라는 건 분명히 알았다. 


재미있게 읽은 소설의 작가는 알고 보니 독일 출신이었고, 친구와 함께 관람한 전시는 독일 예술가의 전시였다. 독일이라는 존재가 내게 천천히 스며들고 있었다. 나름 6개월간 살다 온 뒤 미운 정이라도 들어버린 것인지, 독일은 이제 친숙하고 정겨운 존재가 되었다. 





점점 독일이 좋아졌다. 자발적으로 독일과 관련된 것을 찾아다녔다. 책 제목에 ‘베를린’, ‘독일’이 있으면 망설임 없이 빌려 읽었고, 방문한 영화제에선 독일 출신 감독 영화만 골라서 봤다. 


독일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독일어로 이어졌다. 다시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나기 시작했다. 읽을 줄만 알지 해석하지 못하는 게 괜히 억울했다. 끝내 결심했다. 아무래도 독일어를 다시 배워야 할 것 같다고. 





2019년 여름, 오랜 고민 끝에 무더운 더위를 뚫고 학교에서 독일어 수업을 들었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과 함께 공부하는 독일어는 낯설고도 새로웠다. 1년 전 그때와 달리 지금의 나에겐 반짝이는 열정과 간절한 마음이 있었다. 


누군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독일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der die das, ich du er sie es,.. 기본적인 단계를 넘어가니 점점 독일어가 재밌어졌다. 


배움의 기쁨은 귀했고 달콤했다. 늦은 새벽까지 공부를 마치고 잠에 들 땐 누구보다도 뿌듯했고 스스로가 대견했다. 꿈속에선 자주 독일 거리를 걸었고 독일어로 말하는 꿈을 꾸었다. 올해 겨울엔 예상에도 없었던 독일어 시험을 치르기도 했다. 



독일어 수업시간엔 달달한 하리보 젤리와 함께했다



취업 같은 현실적인 문제를 재고 따졌더라면 절대 독일어를 공부하지 못했을 것이다. 독일어 같은 마이너 한 언어를 왜 배우는 건지 의아하게 바라보는 사람도 있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공부를 이어올 수 있었던 이유는 독일에 대한 애정과 배워보고 싶다는 호기심, 단지 그것뿐이었다. 


시작은 쉽지 않았다. 독일어를 배워서 대체 뭘 할 수 있을까, 시간낭비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처음엔 멀리 도망쳤다. 내가 독일에서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배우면 배울수록 더 열심히 하고 싶다는 마음만 생길 뿐이다. 하나의 언어를 배우는 건 또 다른 세계를 알아가는 일과 같았다. 






이제 나에겐 꿈이 생겼다. 독일어를 열심히 해서 베를린으로 떠나 '베를리너'로 살아보는 것이다. 짧은 여행이 되었든, 취업이 되었든 베를린에 머물며 시간을 보내고 싶다. 물론 쉽지 않을 것이다. 6개월간의 교환학생 시절이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새로운 도전은 언제나 설레는 법이다. 








이건 나의 솔직한 진심이자 애정 어린 고백이다.

어렵게 다시 만난 독일어와 나. 

우리 사이, 이 정도면 인연이라고 말해도 괜찮겠지. 

다시는 쉬이 떠나보내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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