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
손택수
꽃잎 속 수술과 암술이 만나려고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걸 지켜보고 있을 때,
벌이 꿀을 따먹느라 붕붕거리는 소리가
간지럽게 들려오고 있을 때
이상하게 나는 여기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존재하지 않아도 좋은 무엇이 된 것만 같다
그때 잠시 나는 어디에 있었던 걸까
꽃 속으로 내가 빨려 들어갈 때,
저 혼자 일어났다 저 혼자 가라앉는 바람처럼
꽃잎 가상이를 내 숨결로 흔들어보고 있을 때
이상한 일이다. 손택수 시인의 <정지>라는 시를 읽고, 잠시. 아주 짧은 찰나. 내게 멈춤의 순간이 머물렀다. 호흡은 길게 늘어지고, 긴장돼 솟아있던 어깨는 땅을 향해 축 가라앉는다. 잠시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착각 속에서, 처음으로 의문을 떠올렸다.
내 삶에 '정지'(停止)가 있었나?
단 한 번이라도 정지를 허용한 적이 있었나?
내가 끊임없이, 쉼 없이(심지어 자고 있는 순간에도 어쩌면 놓지 않고) 무언가를 계속 행하고 있었다는 것에 대한 자각이 없으니, 정지하지 않고 있었다는 것에 대한 자각도 없다. 그런데 시를 읽고 나니 단 한 번도 정지를 품지 못한 내 삶에 자그마한 의문의 파문이 일었다.
항상 해야 할 일들이 있는데, 그게 10이라면 늘 10을 완전히 다 하고 잠들지 못한다. 일을 할 때는, 일이 워낙 많고 바쁘니까라고 생각했는데, 일을 하고 있지 않을 때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아이를 키우는 일이 직장 다니는 것보다 더 바쁘고 끝이 없는 것이니까,라고 둘러댈 수라도 있지만. 그냥 할 일 없는 백수였던 시절에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내 책상, 우리 집 냉장고에는 Things to do 메모가 붙어있다. 늘 10개쯤은 된다. 나도 모르게, 강박적으로 10개쯤 만들어내는 것 같다. 그중에 실제로 해치우고 신나게 줄을 그어 지워버리는 건 반 정도. 때론 반도 못 된다. 나머지 반은 그다음 To do list로 이월된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그렇게 쳇바퀴처럼 할 일 목록으로 일상을 채우고 있었다. 그래서 하루를 마칠 때는 늘 미진한 마음이 남고, 어깨는 자꾸만 긴장돼 하늘 위로 끝없이 솟아오르는 것이었구나.
시인은 꽃이 바람에 일렁이는 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멈췄다. 아니, 정지를 허용했기에 꽃을 본 것이다. 정지를 허용한 순간 존재하지 않아도 좋은 무엇이 된 것만 같은 초월한 존재가 되었다. 일상에 정지가 머무는 순간, 그 짧은 찰나, 존재가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시간에, 마음에도 꽃이 핀다.
이 글을 마치고 나면 냉장고에 붙여놓은 To do list를 떼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