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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아레테 Dec 08. 2021

나는 엄마가 없어

나는 어떠한 방식으로 엄마를 그릴까


임신을 하고 나니 엄마가 만든 음식이 유독 생각났다.


사실 우리 엄마는 요리를 잘하진 못한다. 학창 시절 부엌일보다는 공부만 열심히 하라는 외할머니의 교육 방침도 있었고, 결혼한 이후에도 전업주부로 가정을 꾸리기보다는 커리어를 발전시키는데 더 집중했기 때문이다. 물론, 엄마가 일을 시작하기 전 잠깐 전업주부였을 때는 오븐을 이용해서 다양한 요리를 만들어주곤 했었다. 생일이나 특별한 날에는 과일이 양껏 올라간 생크림 케이크를 만들어주기도 했고, 피자치즈가 듬뿍 뿌려진 오븐 스파게티와 통닭 요리는 크리스마스 때마다 빠지지 않고 올라오는 가족의 만찬 메뉴 중 하나였다. 엄마의 요리실력이 특출나게 뛰어나진 않다 보니 다양한 요리를 해주진 않았지만 엄마는 워킹망으로써 최선을 다해 우리의 식탁을 풍성하게 만들어주려고 애를 썼다. 그러다 보니 나의 유년시절의 매 순간은 엄마가 만드는 주력 메뉴가 하나씩 자리를 채웠으며 그 음식에 대한 기억은 내가 엄마 반찬을 그리워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결혼한 이후로 맞벌이를 하다보니 반찬을 만들기보다는 주로 마트나 온라인몰에서 사서 먹곤 했다. 사서 먹는 반찬들은 대체적으로 맛이 괜찮았지만 유독 몇 가지 반찬만은 입에 맞지 않은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엄마가 식탁 위에 올려주었던 엄마표 반찬에 대한 그리움이 생겨나곤 했다. 예를 들면 간장과 설탕으로 달콤한 맛을 더 가미한 두부조림이라던가, 식초를 넣어서 새콤한 맛이 일품인 콩나물 무침과 같은 것 말이다. 그건 제3자가 절대로 재현할 수 없는 맛이었다.


하루는 엄마가 만든 콩나물무침이 너무 먹고 싶었다. 이참에 엄마한테 만드는 법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큰 맘먹고 시장에서 한 바구니 어치의 콩나물을 넉넉히 사 왔다. 콩나물무침을 배우고 싶다는 말에 엄마는 한참이나 내 얼굴을 응시하더니, 서랍장에서 큰 냄비를 꺼냈다.


우선 큰 냄비에 물을 붓고, 찜기에 콩나물을 얹힌다음 쪄야 해. 

새콤한 맛은 식초로 낼 거야. 고춧가루는 이만큼만 뿌리면 되고...

하나하나 조리법을 가르쳐주던 엄마의 얼굴이 문득 슬퍼졌다.

 

엄마도 외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음식을 배워둘걸. 

왜 바쁘다는 핑계로 미루기만 하고 진작 배우지 않았을까.

엄마도 너처럼 미리미리 음식 만드는 법을 배웠으면 좋았을 텐데.


엄마의 말에 나는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다.






- 나는 엄마가 없어. 


설날이 올 때마다, 추석이 올 때마다, 할머니의 기일이 지날 때마다,

그리고 외할머니의 빈자리가 떠오를 때마다 엄마는 입버릇처럼 되뇌이곤 했다.


전형적인 경상도 집안에서 자라난 할머니 밑에서, 그리고 아들 선호 사상으로 항상 마지막 우선순위로 치여 늘 서운한 게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쓸쓸하고 외로워질 때마다 할머니의 부재를 곱씹곤 했다.


엄마가 외할머니의 모습을 그리는 방법은 여러 가지였다.


첫 번째는 바로 음식이었다. 

다소 간이 짜지만 투박하고 두툼하게 부친 고기전, 가을이 되면 담아주신 매콤한 고들빼기 김치, 엄마가 입맛이 떨어질 때마다 해주셨던 콩잎 김치, 얼큰하게 고춧가루를 푼 붉은색의 경상도식 소고기 뭇국, 할머니가 직접 담가 처음부터 끝까지 손맛이 담뿍 들어간 된장과 간장 등등.

엄마는 할머니만이 만들 수 있는 음식이 그리워질 때마다, 혹은 계절마다 할머니가 가져다준 반찬을 이제는 직접 본인이 요리할 때마다 음식에 얽혔던 할머니의 추억을 곱씹곤 했다. 


자식들 사이에서 제일 공부를 잘했던 엄마에게 공부에 집중하라며 살림을 하나도 가르치지 않았던 할머니였지만,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그 배려는 엄마에게 후회로 남았다. 엄마는 김치를 먹으면서도 할머니의 손맛을 배우지 못했던 점을 탓했다. 기실 바빠서 음식을 배울 시간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엄마는 김치를 보면 한참 동안 숨죽여 울곤 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담가 둔 된장을 다 먹어갈 때마다, 그리고 할머니가 담가주신 마지막 김치통을 비우자 더 이상 할머니의 손맛을 느낄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엄마는 오열했다.


나는 엄마의 슬픔을 이해하면서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건 내가 나의 엄마의 부재를 아직까지 느껴본적이 없기 때문이리라.


내가 기억했던 할머니의 추억은 할머니 집에서 느낄 수 있는 냄새가 항상 함께했다. 직접 장독대에 장을 담그셨던 할머니는 된장부터 고추장, 생선 말리기까지 손수 하나하나 챙기셨기 때문에 할머니 집에는 온갖 음식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그 냄새는 할머니 집에서만 느낄 수 있는 푸근한 냄새이기도 했다. 할머니는 손맛이 좋았기 때문에 어떤 음식이든 직접 만들어주시곤 하셨다. 일례로 치킨 배달이 익숙지 않던 어린 시절에는 치킨이 먹고 싶다는 동생의 한마디에 냄비 두바쓰가 가득 찰 정도로 닭을 한가득 튀겨주시곤 하셨다. 할머니는 정이 많은 만큼 손이 컸고 항상 많은 양을 만들어 먹이셨다. 사람은 항상 많이 먹고 배가 든든해야 뭘 할 수 있다면서.


할머니는 자신의 딸에 대해 공부 욕심이 많았지만, 손녀에 대해서는 퍽 너그러운 편이었다. 서울대를 가야 하기 때문에 공부하는데 방해될까 봐 친딸에게는 상추도 먹이지 않았던 할머니였지만, 손녀들은 살이 쪄도 이쁘다고 하셨고 음식을 많이 먹어야 건강하다고 다독여주시기도 하셨다. 배가 불러 손사래를 치더라도 할머니는 말 그대로 배가 볼록하게 튀어나올 때까지 끊임없이 음식을 만들어주시곤 하셨다. 가끔 손녀에게 한없이 음식을 많이 먹이는 모습을 보면 엄마는 툴툴거리곤 했다. 식곤증이 올까봐 학창시절에는 많이 먹이지도 않았으면서, 손녀에게는 한없이 너그럽다고.





할머니의 부재를 그리는 두 번째 방식은 바로 노래였다. 

할머니가 좋아하는 노래는 '꽃밭에서'라는 동요였다. 나이가 들어서도, 어느 순간 어른이 되면서 할머니가 서먹해지고 데면데면해졌음에도 할머니는 우리만 보면 '꽃밭에서'를 불러달라고 했다. 돌아가시기 직전 한창 아프셨을 때도 할머니는 침대에 누워서 나한테 그 동요를 불러달라고 하셨다. 


아빠하고 나하고 만든 꽃밭에

채송화도 봉숭아도 한창입니다

아빠가 매어놓은 새끼줄 따라

나팔꽃도 어울리게 피었습니다-


 할머니는 그 노래를 들을 때마다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일찍 여의신 부모님을 생각하셨을까. 


나는 그 노래를 불러드릴 때마다 할머니는 아빠가 더 그리우신 걸까, 지레짐작만 했을 뿐 한 번도 그 이유를 감히 여쭤보진 못했다. 그러다 보니 종종 길가에 피어있는 나팔꽃을 볼 때마다, 그리고 집 인근 유치원에서 간간히 들리는 동요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 이유를 여쭤보지 못했음을 후회하곤 했다. 


외할머니가 노래를 통해 평생 가족을 그리워하듯이 엄마도 외할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돌아가신 할머니의 자리를 그리워한다. 

엄마가 할아버지보다 할머니를 더 그리워하는 건 

그만큼 엄마와 부딪힌 세월이 더 깊고 많아서가 아닐까.


가끔 할머니가 걸었던 거리를 걸을 때마다 엄마는 늘 마음 아파한다.

어느순간 할머니가 너무 힘들어서 집 앞의 마트조차 가기 힘들어하셨다고. 

왜 그때는 빨리 깨닫지 못했는지, 엄마는 오늘도 할머니의 부재를 실감한다.


나는 어떤 방식으로 엄마를 그릴까.

그리고 어떠한 방식으로 엄마의 부재를 견뎌낼 수 있을까.

마음 속에 몇 번의 무너짐을 겪고 나면 담담해질까. 


봄이 오고, 여름이 오고, 가을이 지고, 다시 겨울이 와도 할머니가 없는 사계를 엄마가 겪어내는 모습을 보면서 나 또한 엄마의 부재를 감히 가정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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