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 설명드린 내용은 사무실에 돌아가서 메일로 다시 보내드릴게요. 고민해 보시고 입점 여부 메일로 회신 주시겠어요?
음, (옆에 앉은 공동 대표 – 그의 와이프 - 와 시선을 나눈다) 아니에요. 저희 바로 입점할게요. 어떻게 하면 되나요?
이번 미팅도 입점 엔딩이다. 내 업무의 우선순위가 신규 브랜드 영입에서 매출 관리로 바뀌면서 입점시키는 브랜드의 숫자는 확 줄었지만, 컨택하는 업체 수 대비해서 영입 성공률은 훨씬 높아졌다.
이번 주에는 금요일에 대면 미팅이 하나 더 있다. 인스타그램에서 이미 자체적으로 팬덤을 형성하고 자리를 잡은 브랜드라서, 사실 입점 제안을 하면서도 다음 단계인 미팅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낮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예상외로 한 번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반가운 답이 돌아왔고, 금요일에 찾아가기로 했다.
이 소중한 기회를 놓칠 수 없다. 입점하지 않을 수 없게끔 완벽에 가까운 미팅 준비를 해서 가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2.
고백하건대 예전에 – 예전에, 라는 건 민재님이 오시기 전이다 - 영업을 하러 다닐 때에는 내게 제대로 된 ‘영입 전략’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일 많은 숫자의 브랜드를 우리 플랫폼에 데리고 올 수 있었던 건,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은 숫자의 전화를 돌리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운이 좋게도 내 말빨이 잘 먹히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전화를 돌리다 보면 바로 관심 없다며 끊어버리는 사람도 있지만 – 슬프게도 거의 보이스피싱 취급이다 – 미지근한 반응이긴 해도 질문을 몇 개 던지면서 궁금한 게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럴 때 꽉 물어야 한다.
30분만 시간 내주시면 제가 사무실로 방문드려서 자세하게 말씀드릴게요. 언제가 괜찮으실까요?
굳이 여기까지 찾아온다는데, 30분이면 된다는데, 일정을 잡아주는 경우가 많다. 직접 만나는 순간, 쇼타임이 시작된다.
“브랜드 운영이 진짜 어려운데, 어떻게 이렇게 키우셨을까요? 대단하세요. 저도 대학생 때 잠깐 쇼핑몰 했었는데 너무 힘들더라고요.” 이 세 마디가 상대방의 열 마디를 이끌어낸다. 그럼 거기서 힌트를 얻어 우리 플랫폼에 입점하면 내가 어떤 혜택들을 제공해 줄 수 있는지를 꽤 빠른 템포의 똑 부러지는 말투와 목소리, 미사여구의 조합으로 능수능란하게 설명한다.
미사여구의 늪에 나 스스로 빠져 실제보다 훨씬 과장해서 말한 적? 많았다.
예상치 못한 질문에 당황하지 않은 척 빠르게 대답하려다 사실이 아닌 정보를 제공한 적? 없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영입 성공 여부와는 별개로 – 커머스 파트 영업왕이라고 치켜세워도 – 약간의 자기혐오가 느껴지는 순간이 가끔은 찾아왔다. 아직 난 배워야 할 게 산더미인데 알맹이는 커지지 않고 껍데기인 말솜씨만 좋아지는 것 같았다. 그 말솜씨에는 자연스럽게 거짓말하는 솜씨까지 포함되어 있는 게 안타까웠다.
3.
소라님의 퇴사 이후 얼마 되지 않아 우리 팀에 인턴 2명이 배치되었다. 기존 팀원 1명과 인턴 1명이 한 조가 되어 업무를 하기 시작했다. 나와 함께 일하게 된 인턴은 재미있게도 이름이 수지다 – 혹시 깜빡했을까 봐 언급하자면 내 이름은 지수다. 수지님은 반년 전에 대학교를 졸업하고 두 번째 인턴 생활 중인데, 나랑 나이 차이가 많지 않은데도 보고 있으면 훨씬 동생 같은 느낌이 든다.
이번 금요일 미팅도 수지님과 함께 출동한다. 수지님은 이미 주체할 수 없는 흥분과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는데, 브랜드 대표가 사업하기 전에 그냥 SNS 인플루언서였던 시절부터 팔로우하면서 좋아했단다.
매월 첫 번째 위클리 미팅 때 이번 달에 각 카테고리별로 어떤 상품군을 주력으로 선정하고 어떻게 운영할지 이야기하거든요. 미팅 전에 카테고리 담당자가 지난달 카테고리 실적, 경쟁사 트렌드, 우리 고객과 전반적인 마켓 트렌드 3가지를 분석해서 상품군을 정하고 왜 이걸로 정했는지 근거를 마련하고 전략을 짜야 돼요. 이번에 영업하러 가기 전에도 이 분석 방법을 활용해서 영입 전략을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아요.
수지님에게 민재님이 우리에게 보여줬던 3C 트렌드 분석 삼각형을 설명했다. 수지님이 이미 이 브랜드의 팬으로서 갖고 있는 인사이트가 있을 것 같아서 Company 부분을 담당하기로 했다.
이틀 뒤에 수지님이 브랜드의 이번 가을 시즌 신상품과 캐리오버(carry-over: 베스트셀러로서 시즌 연속으로 판매하는 상품) 상품을 분석해서 평균가격대, 주력 상품군과 특징 등을 확인하고, 자사몰과 인스타그램의 고객 리뷰와 댓글을 분석해서 주 고객 성향, 고객들이 좋아하는/요청하는 포인트 등을 정리해 왔다.
나는 이 내용을 기반으로 우리 플랫폼에서 충분한 수요가 발생할 수 있을지 고객 트렌드를 분석하고, 이미 입점해 있는 유사한 경쟁사의 특징과 실적을 바탕으로 차별화 전략과 매출 목표를 세웠다.
다음은 민재님에게 갈 차례다. 보통 이 브랜드처럼 외부채널 입점이 처음인 경우에는, 제일 궁금해하는 게 판매수수료이기 때문이다. ‘입점 후에 이런 전략으로 높은 매출 올릴 수 있게 해 줄게!’도 물론 중요하지만, 여기에 ‘그 매출 너희가 거의 다 가져갈 수 있게 해 줄게! 이건 정말 특별한 거야!’까지 덧붙일 수 있다면 영업직으로서는 양손에 무기를 쥐고 있는 셈이다. 쉽게 가질 수 있는 무기가 아닌 만큼, 내가 마음대로 정할 수 없는 영역이라 민재님의 결정이 필요하다.
민재님은 수지님과 내가 함께 준비한 자료를 빠르게 훑었다.
좋아요. 입점하고 6개월 동안 50% 인하된 수수료 혜택 주는 걸로 진행하세요.
4.
1층에는 브랜드 쇼룸이 있고 2층에 미팅하기로 한 사무실이 있었다. 수지님과 계단을 올라갔다. 수지님은 마치 아이돌을 만나기 직전인 것처럼 설레어하고 있다.
옛날부터 좋아했다고 얘기하는 건 좋은데, 너무 팬심을 드러내지는 말아 주세요.
미팅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우리 플랫폼의 기본적인 소개와 함께 어떤 성향의 고객들이 있는지, 최근 고객들이 어떤 트렌드를 보이고 있는지, 그 트렌드에 대표님의 브랜드가 얼마나 적합한지 자연스럽게 스토리를 이어 나갔다.
브랜드 상품군과 고객 분석 부분은 담당했던 수지님께 바통 터치를 했다. 대표님이 팔로워 1,000명이던 시절부터 좋아했다고 수줍게 고백하며 말문을 연 수지님은 의외로 준비한 내용은 엄청 프로페셔널한 모습으로 이야기했다.
와, 이런 것까지 분석해 오셨어요? 오히려 저희가 오늘 미팅하면서 배워가는 게 많은 것 같은데요.
대표는 작은 노트와 펜을 꺼내 고객 리뷰와 댓글을 보고 우리가 분석한 내용을 적기 시작했다. 미팅 끝나고 자료는 다 메일로 보내드릴 거라서 쓰지 않으셔도 된다고 말하며 손을 내저었다. 그제야 대표는 아, 감사합니다. 하고 펜을 내려놓고는 다시 발표에 집중했다.
미팅의 말미에는 경영진과의 고군분투 끝에 얻어 낸 전리품인 것처럼 포장해서 – 실제로는 민재님의 벽이 상당히 얇고 낮았지만 – 인하된 수수료 혜택을 제시했다.
최종 입점 여부는 브랜드 실무진들과 회의하고 결정해서 연락을 주기로 했다. 대표는 우리와 같이 1층 쇼룸으로 내려가 새로 나온 신상품들을 직접 보여주었다. 인사를 하고 나가려는데 작은 쇼핑백 2개를 건넸다. 대표는 이렇게 직접 와서 설명해 준 것도 고맙고 오랫동안 관심을 가져준 것도 고맙다며 수지님을 바라보고 미소를 지었다. 나와서 쇼핑백을 열어보니 조그마한 키링이 들어있었다. 귀여운 키링이네요, 하고 옆을 보니까 수지님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왈칵 쏟을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5.
영입 성공도 기쁜 일이지만, 그것보다도 나와 수지님이 열심히 분석하고 준비한 내용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희망을 가지게 만들었다는 데에 더욱 큰 성취감이 몰려들었다. 수지님은 이번이 첫 영입이다 – 게다가 최애 브랜드가 첫 영입 성공 대상이 되다니 흔치 않은 경험이다. 둘이서 신이 나서 하이파이브를 하고는, 이 행복한 소식은 슬랙 DM이 아니라 직접 얼굴 보며 전하고 싶어 민재님 자리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