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창작물을 통해 은유로 가득한 세계에 입장한다. 은유의 세계는 다양하다. 어떤 이야기가 부유하며 떠다닐 때 창작자는 그냥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그냥 공중에 흩뿌려지는 물안개와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이해를 놓쳐버리면 길을 잃어버리는 것 같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세계에 들어서는 건 어려운 일이다. 한국에서 가장 은유를 잘 살리는 감독이 이창동이라고 생각한다. 답답하고 지긋지긋한 세계에 갇힌 인생의 한 이야기를 전개한다. 주인공의 발자취로부터. 그 발자취를 따라다니다 보면 어느새 이창동 세계에 빠져버린다. 그는 단편소설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으로 <버닝>을 만들었다. 앞선 영화 작품으로 좋은 감독이라는 것을 증명했었다. <시>는 어려운 영화이며 은유가 가득하지만 <버닝>에 비하면 은유적이지 않다. 시를 다루는 영화 <시>보다 더 은유적이고 더 독특한 영화가 <버닝>인 것 같다. 그건 아마 원작의 주인공 무라카미 하루키가 가진 힘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여러 문학에서 캐릭터의 대화를 통해 더욱 입체적으로 만든다.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표현하고 싶은지 캐릭터를 통해 독자에게 알려준다. 이러한 점을 <버닝>에서 이창동은 이창동만의 은유로 표현했다. 나는 두 가지의 영향으로 글을 남긴다. 나는 어떤 은유를 표현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각 캐릭터가 해왔던 행동과 말에 대해서나 아니면 줄거리나 은유적인 세계 전부. 할 말이 많다. 그래서 글을 쓰는 건 늘 어려운 일이다.
무언가를 상상할 때는 어떤 형체를 떠올리고 경험했던 것을 떠올린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무언가를 상상하는 건 쉽지 않다. 은유는 상상으로 이루어진 어떤 무엇인데 전종서는 잊어버리면 된다라는 말을 유아인에게 한다. 즉 중요한 건 떠오르는 것이 없도록 그래 왔던 경험이나 진실을 잊어버리면 된다는 것이었다.
전종서는 영화 시작 후 20분까지 빠른 속도로 '해미'라는 캐릭터를 보여주었다. 말과 행동들이 독특한데 매력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 무언가를 계속해서 갈구하는 사람은 불안정해 보인다. 그 불안정함이 사람을 부자연스럽게 만든다. 그녀는 유아인에게 과거에 머물러 있음을 넌지시 말했고, 팬터마임이라는 퍼포먼스를 통해 자신에게 없는 무언가를 갈구하고 있다는 은유를 재확인시킨다. 그리고 자신의 캐릭터를 아주 잘 표현하는 대사를 말해준다. 리틀 헝거와 그레이트 헝거. 즉, 리틀 헝거는 그냥 배고픈 사람이고 그레이트 헝거는 삶의 의미에 굶주린 사람이다. 그러니까 자아실현을 꿈꾸는 사람인 '해미'는 그레이트 헝거를 꿈꾸면서, 자신이 리틀 헝거라는 진실을 잊어버린 캐릭터다. 그러니 계속 불안정하고 그레이트 헝거를 갈구하는 것처럼 부자연스럽게 비친다.
유아인 '종수'에게는 아프리카 여행을 하는 동안, 자신의 집에 살고 있는 고양이를 봐달라는 부탁을 한다. '해미'는 계속해서 있는 듯한 이야기를 있게끔 말을 하며 '종수'를 헷갈리게 한다. '해미'의 집에 고양이는 존재는 했을 수도 있지만 처음부터 없었을지도 모른다. 또 우물에 빠진 사건도 실제 있었는 듯하게 기억한다. 하지만 정작 '종수'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건 '해미'의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종수'의 엄마는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해미'가 실제로 빠졌는지는 모른다고 한다.
스티븐 연이 맡았던 '벤'은 웃음과 여유 뒤에 살인의 은유가 있다. 그는 개츠비 같은 남자다. 무엇을 하는지는 모르는데 돈은 많은 사람. 그를 보며 '종수'는 한국에는 그런 사람이 너무 많다는 말을 한다. 흔히 3루타에서 태어난 줄 모르고 3루타를 친 줄 안다는 말은 적어도 자랑스러워하지는 않았으면 하는 감정이 담긴 말이다. 그래서 말이지만 '벤'은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자신의 지위나 신분, 능력을 활용해서 '해미'와 같은 유형의 사람들을 만난다. 그 점은 '해미'가 사라진 뒤 김수경이 맡았던 '연주'를 통해 알려준다. '벤'은 재밌으면 뭐든지 한다고 했다. 독특한 이성을 친구들에게 구경거리로 보여주었고, 재미로 비닐하우스를 태웠다. 우리는 살면서 분노해야 하는 때를 놓치기 마련이고 (생업에 의해), 또한 분노하지 않는 시간(나서다가 다침)에 살고 있음을 알고 있다. 구경거리가 된 '해미'는 자신의 세계에 심취해서인지 몰라도 그것이 구경거리 인지도 모른 채 그레이트 헝거에 대한 춤을 춘다. '종수'가 처음 '벤'을 본 건 아프리카 여행을 하고 귀국을 한 '해미'를 만났을 때였다. 여행 이후 공항에 있는 기간 동안 부쩍 친해진 모습이 '종수'에게는 낯 선 모습이지만 그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다. 곱창전골과 함께 한 술자리가 끝날 무렵 '해미'는 아프리카에서 느꼈던 외로움과 찬란함 등의 감정을 자세히 '종수'에게 이야기해준다. 거대한 해가 사라지는 것처럼 자신도 사라지는 것 같은 감정이 든 것 같다며 그때의 감정으로 눈물을 흘린다. 그러자 '벤'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며 신기해한다 난 한 번도 운 적이 없다는 '벤'은 눈물을 흘리지 않으니까 슬픈 감정이 뭔지 모른다는 말을 한다. '벤'은 '종수'에게만 은유를 품는다. 태운다, 연기로 사라진다, 처음으로 질투심을 느꼈다와 요리를 재물로 표현하는 것. 정말 '벤'이 살인자라면 이 모든 표현이 살인을 은유한 섬뜩한 말이 되는 것이다.
소설을 쓰는 '종수'의 유일한 글은 아버지의 탄원서이다. 순박한 농촌 청년의 아버지는 분노조절장애가 있는 캐릭터로서 죗값을 받는다. '해미'의 집에서 노트북으로 무언가를 쓰는 모습이 나오긴 하는데 무엇을 하는 건지는 나오지 않는다. <버닝>의 이야기가 '종수'의 실제 이야기는 분명 아니겠지만, 유아인은 '종수'라는 캐릭터를 통해 '해미'와 '벤'을 따라다니며 그 둘을 지켜보는데 무게를 실는다. 공항을 이후로 '종수'는 '해미'와 '벤'에게 그렇게 깊은 호기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저 관찰할 뿐이다. '해미'를 만난 건 우연히 서로 알바를 하고 있을 때였다. '해미'는 '종수'를 보고 한 번에 알아보지만 '종수'는 '해미'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것은 '해미'가 못생겼던 과거에 지금은 성형을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해미'의 집에 간 '종수'는 정작 고양이가 보이지 않자 고양이도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냐고 묻는다. '해미'는 설마 없는 고양이를 있다고 말하겠냐며 키스를 하고 둘은 섹스를 한다. '해미'의 방에선 하루 두 번 남산타워에 비친 빛이 운이 좋게 들어온다. '종수'는 섹스를 하는 도중 그 빛을 확인한다. 그 뒤로 아프리카에 가 있는 동안 '종수'는 남산타워를 보면서 자위를 한다. 마치 '해미'와의 지난 일들이 없었던 일처럼 지나간 일이 돼버린다. 이건 무엇을 얘기하고 싶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집이 북향이라 비치지 않을 빛이 남산타워를 통해 비친다는 점을 말해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그레이트 헹거가 되고 싶지만 진실을 잊어버린 '해미', 재밌는 것은 뭐든 다 하는 '벤', 가슴속에 무엇인가를 태우고 싶어 하는 '종수' 이 뚜렷한 세 명의 입체적인 이야기가 담긴 영화는 보는 관점에 따라 무엇을 말할지 고민이 될 것 같다. 빠진 이야기가 몇 개 있다. 고양이와 대마초, 수수께끼 같은 벤의 이야기, 마지막 장면의 의미. 이 모든 것은 세 명의 캐릭터가 연결된다. 창작자는 작가를 통해 무엇을 남기고 싶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