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겐 정의가 없고 부모에겐 사랑이 있다<사마에게>

by 성운

자유를 꿈꿨던 시리아 내전은 많은 일반인이 희생을 당했다.

주변에 폭탄이 떨어지는 순간에도 카메라로 현장을 촬영했던 사람이 있었다. 연출된 CG나 효과음이 아닌 실제상황이었다. 병원에선 하루도 빠짐없이 부상자와 사망자로 가득했다. 병원이라고 공격하지 않는 인도적인 군대는 없었다. 도시의 모든 건물이 폐허가 되었고, 병원도 예외 없이 폐허가 되었다. 어떤 날도 폭탄이 떨어지지 않은 날이 없었다. 우리가 여유롭게 마시는 커피 한 잔의 일상처럼 그들의 일상은 폭탄과 총소리를 듣는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아기들은 웃었고, 아이들은 어른들을 위해 남몰래 울었고, 어른들은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서 연대했다. 이 모든 것을 고발한 영화 <사마에게>가 얼마 전 개봉했다.

<플로리다프로젝트>, <가버나움>에는 일종의 영화적 장치와 결말을 내기 위한 과정들이 있어서 불행해 놓인 현실을 영화로 잘 풀이했다고 생각해서 좋았다.

이때, 알게 된 개념 중 빈곤과 불행을 적나라하게 포장해서 대중에게 판다는 것을 빈곤 포르노라고 하는데 평론가에서도 의견이 갈린다고 한다. 나도 이 부분은 아직 잘 모르겠다. 문학작품에도 수많은 빈곤과 불행이 존재하고 있고, 우리는 같은 시대에 살면서도 전혀 다른 문명에서 살아가고 있다. 지구 반대편에서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각자의 환경에 따른 현대라는 시간의 영향을 받으면서 모르는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즉, 관심이 있으면 몰라도 없으면 영원히 모르면서 살 수 있는 시대다. 그래서 이런 영화는 돈이 되겠지만, 반대로 이런 영화에 관심이 없거나 불편함을 느끼면 그들은 돈을 벌 수 없다.

그렇다고 돈을 벌기 위해 더 불쌍하게, 더 처참하게, 현실보다 더 잔인하게!라고 영화, 문학이 그런 모습을 취할까.

그렇게 하기에는 현실이 더 불쌍하고 처참하고 잔인하다는 것을 알고, 오히려 영화나 문학작품이 순화되었다는 것을 안다.


평생 아름다운 것만 봐도 모자를 세상에 굳이 어두운 것을 봐야 하는지 의문을 가졌었다. 아름답고 행복한 것만 보면 긍정적이고 건강한 마음이 더 커지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었었다. 아름다운 것에는 사랑이 있고 행복이 있겠지만, 만약 아름답지 않다고 해서 행복과 사랑이 없을까. 이 같은 고민은 우리보다 불쌍하고 가난한 나라의 행복지수의 통계에 저 사람들도 행복하구나라며 대한민국의 자살률과 그들의 웃음으로 행복을 비교하는데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런 통계도 결국 자본이 만드는 허상이구나, 사회의 이면을 감추는 장치구나라는 생각을 해주는 게 있었다. 사회의 이면을 잘 보여주는, 그러니까 한 원시 부족의 이야기 하나 중엔 이런 이야기가 있다.

문명이 발전된 사회에는 아직도 원시부족 이야기는 돈이 된다. 많은 촬영팀과 방송 관계자들은 그들에게 몇 푼의 돈을 쥐어주며 행복한 미소를 띠라고 할 것이다. 젖가슴을 드러낸 채로.

그러면 그들은 문명으로 발단된 자본주의에서 그들의 생계와 미래를 위해, 부끄러움을 주저하지 않는다.

원시부족도 요즘은 다 가린다더라!


사회학자 지그문트바우만(1925~2017)은 여러 차례 액체사회를 강조했다. 액체는 늘 흐르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 현대 사회도 마찬가지로 유동하며 변화와 발전을 거듭했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듯, 놀랍도록 발전하는 사회의 이면에 발생되는 현대인의 고독, 잉여, 난민, 불안, 홀로코스트 등을 날카로운 시선과 통찰력(출판사 의견)으로 분석했다. 또한 밀레니얼 시대에 접어들면서 다시 사회주의와 과거의 향수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고독과 불안의 열풍이 일면서 지그문트 바우만을 번역하고 출판하는 책이 늘어났다고 한다.

지금 시대에서 그의 사상에서 배울 수 있는 건 이런 현대사회를 뒤돌아볼 수 있는 발제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히어로 영화를 좋아하는데, 어벤저스보다는 엑스맨에 더 가깝고 엑스맨보다는 스파이더맨에 가깝다.

특히 많은 사람이 사랑하는 토비맥과이어의 스파이더맨을 사랑하는데 한 인간이 히어로가 되어가는 과정을 그려감으로써 그에게 공감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는 히어로 영화라서 더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단체의 이야기보다는 소수와 개인으로 갈수록 내 이야기 같아서 더 좋아하게 되는 것 같다.

처음 어벤저스를 보고 친구한테 이런 의미 없는 싸우는 영활 왜 보냐라고 한 적이 있었다.

그건 내가 각 개인의 서사를 몰랐던 때였다. 그 후로 아이언맨, 캡틴 아메리카, 헐크, 블랙 위도우, 토르 등의 독립영화를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지금은 누구보다 마블의 팬이 되었다. 어벤저스 시리즈가 진행될수록 선, 악이 아닌 서로의 이해와 관련된 정의를 그렸다. 또한 악이라고 생각했던 타노스 또한 타노스대로 정의를 보여주었다. 여기서 무엇이 정의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해 주었다는 점에서 마블은 보통의 히어로 영화를 뛰어넘었다.

세상에 정답은 없다. 정의란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고 잘 살기 위해 존재하지만, 그 정의로 인해 불행하고 잘 살지 못하는 사람도 존재하기 마련이다.


히어로 영화엔 공통점이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배경처럼 죽는다. 건물과 도로가 붕괴되지만, 초점은 히어로에 있다. 그가 살리기로 선택한 사람은 살지만 그가 보지 못하는 사람은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주인공이 살리는 사랑하는 여자, 또는 비중 있는 스토리의 중심에 있는 엑스트라에 초점을 맞춘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가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니.

그리고 현실에는 <사마에게>처럼 히어로가 없다. 우리나라 역사 민주화운동처럼 평범과 보통사람들의 시선이 히어로가 될 수 있을 뿐이다. 그 히어로들은 아무런 힘이 없고 무기력해서 많이 모여야 한다. 정말 많아야 한다.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이렇게 모인 히어로의 시선이 있었다면 <사마에게> 영화 내용은 조금 달라졌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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