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도착하는 길

삶의 속도를 다시 설계하며

by 이니슨

빠르게만 흐르던 일상에서 한 발 비켜섰더니,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장면들이 조용히 하루 안으로 들어왔다. 잊고 있던 감각이 회복됐다.


늘 운전하던 퇴근길에 버스를 탔다. 일하는 곳에서 30여 분 걸으면 집까지 오는 버스가 있는 걸 알고 있었지만 늘 빠른 길을 택해왔다. 오늘은 문득, 조금 돌아가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찬 바람 사이로 은은히 풍기는 봄 내음을 맡으며 오랜만에 걷는 걸음은 상쾌함을 발자국으로 남겼다. 단추구멍만큼 빨라진 숨소리는 살아있음을 알려주었다. 나는 이렇게 걷는 것을 즐기던 사람이었지, 새삼스레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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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류장에 도착해 책을 펼쳤다. 바쁘다는 핑계로 한동안 덮어두었던 책이었다. 종이에서 번지는 향에 마음까지 포근해졌다. 급할 것 없이 느긋한 시간이 이렇게나 다정했던가.


버스에 올라서도 책을 읽다가 이따금 흘러가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하천을 따라 러닝하는 사람들,

늘 지나치던 나무의 결,

계절이 바뀌는 냄새,

바람에 흔들리는 마른 가지.

처음 보는 듯 낯설었다.


그제야 알았다. 목적지에 빠르게 도착하는 데만 집중하느라 길 위의 시간을 잃어버리고 있었다는 걸. 나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풍경을 스쳐 지나왔던 걸까.


버스는 돌고 돌아 한참 만에 집 앞에 멈춰섰다. 운전하면 20분이면 충분한 거리를 한 시간이 걸려 도착했다. 하지만 싫지 않았다. 오히려 생기가 돌았다고 하면 이상하려나? 마음에 숨이 트인 듯했다.


"감사합니다."

기사님께 인사를 건네고 폴짝 뛰듯이 내려섰다.


건너편 집을 올려다보며 아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창문 좀 내다봐봐. 엄마 보여?"

"응, 보여. 엄마 오는 거 보면서 기다릴게."


천천히 길을 건넜다. 창문 너머에 있을 아이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봄바람을 가득 품은 듯 둥실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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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얼마나 빨리 도착했는가'로 하루를 평가하곤 한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건 '그 시간 동안 무엇을 느꼈는가'일지도 모른다.


속도를 늦추자 생각이 정리되었고,
호흡이 깊어졌고,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나는 오늘, 조금 늦게 도착했다. 대신 더 많은 풍경을 담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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