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나무로 유명해진 부여의 명소
부여 임천에 둘레 1,200m의 성흥산성 또는 가림성은 사랑나무로 유명해지기 전에는 인근 초·중·고 학생들이 매년 찾는 소풍 장소였다. 당시 학생들에겐 왜 가야 하는지 모르고 오르던 조그만 산성에 불과했다. 그러나 영화와 드라마에서 성흥산성 정상에 있는 아름답고 커다란 나무를 배경으로 삼아 촬영하면서 유명세를 얻기 시작했다. 그 덕분에 과거 소풍 장소로 기억하던 학생들은 어른이 된 지금 이곳에 방문하는 많은 외지인과 외국인들을 보며 여러 생각에 잠기게 하는 장소가 되었다.
외지인 내가 이곳을 방문하면서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이곳에서 촬영된 영화와 드라마가 무엇이 있는지를 보여주는 팻말이다. 영화와 드라마에 나왔던 장소가 어디인지를 찾으며 걷다 보면 멀리서는 보이지 않던 웅장한 기암절벽이 갑작스럽게 등장하여 놀라게 한다. 절벽 사이에 만들어진 가파르고 좁은 돌계단을 오를 수 있을까 걱정하며 한 발 한 발 내딛다 보면 그토록 보고 싶었던 사랑나무라고 불리는 느티나무가 등장한다. 그리고 그 밑으로 사진을 촬영하기 위해 줄 서 있는 사람들을 보며 나의 걸음은 의지와는 상관없이 점점 빨라지게 된다. 왜냐면 사랑나무 아래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마음도 있지만, 나도 기념사진을 촬영하기 위해 길게 늘어서 있는 줄 끄트머리로 달려가기 위해서 말이다.
사랑나무를 배경으로 세상 가장 행복한 표정으로 다양한 제스처를 취하며 사진을 촬영하고 나면 비로서 산성 아래로 펼쳐진 주변 환경이 눈에 들어온다. 산성 아래 넓게 펼쳐진 논과 작은 집들 너머로 젓갈로 유명한 강경읍을 비롯한 금강 하류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경관이 그토록 아름다울 수 없다. 탁 트인 주변을 내려다보고 있으면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정상에 올라오느라 흘린 땀을 기분 좋게 말려준다. 그리고 옛 선조들은 어떻게 주변이 한눈에 들어오는 이런 장소를 선택하고 산성을 쌓았는지 감탄하게 된다. 밑에서 바라본 내 눈에는 주변의 그저 그런 조그마한 산에 불과한데 말이다.
웅진 천도 이후 위기에 봉착한 백제
이토록 아름다운 경관을 보여주는 성흥산성은 백제가 언제 축성했는지를 알 수 있는 유일한 성으로 귀중한 역사적 장소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동성왕 23년인 501년에 산성이 만들어졌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현재에도 성문과 건물터를 비롯한 우물 등이 발견되고 있다. 그렇다면 왜 동성왕은 이곳에 산성을 축조했으며 김부식은 <삼국사기>에 기록했을까? 그것은 고구려에 한강 유역을 빼앗기고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불가피하게 천도하면서 불안해진 백제의 대내외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다.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신라로부터 1만의 원병을 얻어 한성으로 올라가던 태자(훗날 문주왕)는 개로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북진을 포기하고 산으로 둘러싸여 방어하기 유리한 웅진으로 서둘러 천도하게 된다. 그렇지만 수도를 빼앗기는 것을 넘어 국왕이 죽었다는 사실은 백제를 멸망시킬 수 있을 정도로 큰 위기였다. 그래도 문주왕의 뛰어난 지도력과 500년에 가까운 역사를 가진 백제는 쉽게 무너지지는 않았다. 문주왕은 서둘러 대두산성을 쌓아 고구려의 남하를 저지하고, 백제로 이탈하려는 탐라 등 여러 세력을 다시 백제 영향권 아래 두는 데 성공한다. 또한 맏아들 삼근을 태자로 삼으며 왕실의 건재함을 백제 대내외에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런 문주왕의 노력이 완벽하지는 않았다. 병관좌평이던 해구가 왕의 명령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등 백제의 귀족 간의 권력다툼을 완벽히 통제하는 데 실패했다. 이런 가운데 사냥을 나섰던 문주왕은 해구의 사주를 받은 도적들에게 목숨을 잃고, 13살의 어린 태자(삼근왕)가 국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해구는 이때야말로 자신이 국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연신과 모의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다행히 삼근왕이 해구의 반란을 진압하며 백제 왕실을 지켜냈지만, 정작 자기 삶은 지키지 못하고 15살의 어린 나이에 죽고 만다.
다시 위기에 처한 백제는 서둘러 문주왕의 동생인 곤지의 아들을 다음 왕으로 추대하여 즉위시켰다. 이 인물이 바로 479~501년까지 재위했던 백제의 제24대 동성왕이다. 어려서 담력이 세고 활을 매우 잘 쏘았다고 기록되는 등 용맹한 동성왕은 무력으로 백제와 왕실을 지켜낼 인물로 최고로 적합한 인물이 아니었을까 싶다. 실제로 동성왕은 국왕으로 즉위하자마자 말갈에게 빼앗긴 한산성을 되찾아 오면서 백제의 힘이 아직 강성하다는 사실을 주변에 알렸다. 동시에 백제 귀족의 이탈과 고구려의 남하를 막기 위해 적극적인 외교 정책을 펼쳤다. 중국 남제에 사신을 보내 우호 관계를 확인하고, 신라 이찬 비지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신라와의 동맹을 강조했다. 또한 탐라가 공물을 보내지 않자 직접 군대를 끌고 원정길에 나서기도 하면서 점차 백제는 안정을 되찾아가기 시작했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잘못된 길을 선택한 동성왕
동성왕은 대외적으로 안정을 이루자 왕실의 위엄을 보이고자 궁궐에 연못을 만드는 등 국가 운영에 굳이 필요 없는 여러 토목공사를 벌였다. 문제는 홍수와 가뭄 등으로 생활이 곤궁해진 백성들이 서로를 잡아먹을 정도로 삶이 피폐해진 시기였다는 점이다. 여기에 전염병도 창궐하여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어갔다. 많은 신하가 나라의 창고를 열어 백성을 구휼해야 한다고 외쳤으나, 동성왕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고구려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역의 백제 사람 수천 명이 고구려로 넘어가기도 하였다.
그러자 동성왕은 신하와 백성들이 이탈하지 못하도록 더욱 강경책을 펼쳤다. 그중의 하나가 다른 나라나 귀족들이 웅진으로 침범하지 못하도록 방어하기 위해 부여에 가림성을 축조하고, 조정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위사좌평 백가를 성주로 임명하여 파견하였다. 동성왕의 갑작스러운 명령에 좌천되었다고 생각한 백가는 병을 핑계 삼아 부임을 거부했다. 하지만 계속 명령을 거부할 수는 없어서 가림성으로 향했으나, 그의 마음속에는 동성왕에 대한 미움과 분노가 가득했다. 그러던 중 501년 11월 동성왕이 부여로 사냥을 나왔다가 큰 눈을 만나 가림성 인근에 머문다는 소식을 접한 백가는 자객을 보냈다. 동성왕 이 과정에서 큰 상처를 당하고 한 달 뒤 죽고 만다. 새로운 국왕으로 즉위한 동성왕의 아들 무령왕은 즉위하자마자 군대를 동원하여 가람성의 백가를 죽인 뒤, 시체를 백강에 던져버렸다.
여기에는 다른 주장도 있다. 동성왕이 말년에 백성의 어려움을 도외시하고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이는 것에 반발한 귀족들이 동성왕을 죽이고 무령왕을 즉위시킨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 근거로 백가가 동성왕에 상처를 입힌 직후 곧바로 웅진으로 들어가 권력을 장악하려는 노력을 보이지 않았으며, 무령왕이 보낸 토벌군에 별다른 저항을 보이지 않았다는 점을 내세운다. 무엇이 진실이든 분명한 것은 동성왕이 초심을 잃고 국정을 운영한 것에 대한 불만으로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역사는 민심을 살피지 않는 지도자의 결말이 어떻게 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당나라 유인궤가 인정한 난공불락과 민심
3~4m의 성벽 높이를 가진 성흥산성은 산 정상을 돌을 이용하여 둘러쌓은 태뫼식 석축산성이다. 백제 초기 흙으로 성벽을 올렸던 것과는 다르게 성흥산성을 매우 견고하게 쌓은 것은 이곳이 교통의 요충지이며 웅진을 방어하는 매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음을 보여준다. 또한 적의 오랜 침략에도 버틸 수 있도록 산 정상에는 여러 건축물이 자리할 수 있는 넓은 면적의 공터가 자리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생존하는데 제일 중요한 우물도 산성 내에 설치되어 있다.
그래서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멸망한 것에 반발하여 부흥 운동이 일어났을 때 성흥산성은 주요 거점으로 활용되었다. 멸망한 백제 영토를 관할하던 당나라 장수 유인궤는 성흥산성이 부흥 운동의 주요 거점이 되지 못하도록 맹렬하게 공격했다. 하지만, 난공불락의 성흥산성을 점령하는 것이 너무도 어려워서 유인궤는 <이 성이 험하고 견고하여 공격하기 어렵다>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천혜의 요새 성흥산성을 점령한 백제 부흥군은 지도계층이 권력다툼을 벌이면서 민심을 잃고 다시는 백제를 일으키지는 못한다.
이와는 반대로 민심을 얻어 나라를 건국하고 후삼국을 통일한 유적지가 성흥산성 정상에 자리하고 있다. 고려 왕건의 휘하 명장이었던 유금필은 후백제의 견훤과 전투를 벌이고 부여 임천을 지나가던 중 오랜 전쟁으로 피폐해진 사람들에게 군량미를 풀어 구제해주었다. 당시 호족들이 자신의 세력을 키우기 위해 곡물을 빼앗고 강제 동원하는 모습과는 너무도 다른 선행에 성흥산성 인근 사람들은 감복하며 연신 감사의 말을 전했다. 그리고 유금필이 떠난 후에도 고마움을 잊지 않고자 성흥산성 정상에 사당을 세워 지금까지 해마다 제사를 지내고 있다. 이후 백제 유민이라는 생각을 가진 부여의 사람들은 견훤의 후백제를 지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구려를 계승한다고 천명한 고려를 지지했다. 그래서일까? 성흥산성을 내려오면서 민심을 무시한 동성왕과 백성을 가족처럼 아끼며 보살핀 고려 왕건의 정책이 유독 비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