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은 서울에서 시작해서 중소도시를 넘어 농어촌 구석구석까지 태극기가 휘날리지 않은 지역이 없었어요. 그렇기에 전국 곳곳에는 그날의 뜨거웠던 함성을 기억하는 명소들이 굉장히 많아요. 그중에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었던 이갑성과 관련된 두 곳을 소개해드릴게요. 그럼 이갑성이 누구인지 먼저 알아볼까요.
이갑성(1889~1981)은 대구에서 태어나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뛰어난 인재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경상도와 전라도에서도 3·1운동이 펼쳐질 수 있도록 노력한 독립운동가예요. 물론 그로 인해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러야 했지만요.
3·1운동에서 이갑성이 가장 잘한 일은 거사 하루 전날인 2월 28일 저녁 스코필드 박사(한국 이름 석호필)를 찾아간 일이에요. 이갑성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수였던 스코필드 박사를 찾아가 내일 만세 시위가 있을 거라고 말하면서, 독립선언서를 영어로 번역하여 미국 백악관에 보내 줄 것을 요청했어요.
이튿날인 3월 1일 오전에도 이갑성은 다시 스코필드를 찾아갔어요. 학생들이 만세 시위를 벌일 예정이니 탑골공원에 2시까지 와서 그 모습을 사진에 담아달라고 말했어요. 평소에도 착한 한국인들이 일제에 억압받으며 고생하는 모습이 안타까웠던 스코필드는 이갑성의 부탁을 흔쾌히 수락하고는 거리로 나가 태극기를 힘차게 흔들며 독립을 외치는 한국인들의 모습을 연신 카메라에 담았어요. 오늘날 태극기를 힘차게 흔들며 독립을 요구하는 3·1운동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사진은 모두 스코필드가 위험을 무릅쓰고 카메라에 담은 것들이에요. 너무도 고맙고 감사한 일이죠.
서울에서 만세 시위를 기록하던 스코필드는 경기도 화성 제암리에서 일본군에 의해 마을 주민 23명이 천도교 예배당에 갇혀 학살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즉시 그곳을 찾아가 끔찍한 일제의 만행을 카메라에 담았죠. 그리고는 중국 상하이에서 발행되던 『상하이 가제트(The Shanghai Ga ette)』에 사진을 보내 일제의 비인도적인 만행을 세계에 알렸어요.
또한 스코필드가 작성한 「수촌 만행 보고서」는 미국에서 발행되던 장로회 기관지에 실리며 일제를 당혹스럽게 만들었어요. 스코필드가 외국인으로 우리보다 안전한 위치에 있다고 할지라도, 일제에 의해 여러 불이익을 넘어 목숨까지 위협받을 수 있는 상황에서 한국을 도와준 스코필드가 너무도 감사하지 않은가요. 그리고 스코필드가 우리를 도울 수 있도록 부탁한 이갑성에게도 말이죠.
스코필드에게 어려운 일을 부탁한 이갑성은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하도록 동분서주했어요. 한강 이남 최초로 3·1운동이 벌어진 전라북도 군산시 구암동도 이갑성의 영향이 컸어요. 이갑성은 2월 26일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재학 중이던 김병수에게 독립선언서 200여 매를 전달하며 고향으로 내려가 만세운동을 펼쳐달라고 부탁했어요.
이에 일제의 감시를 피해 군산으로 내려온 김병수는 28일 스승 박연세와 이두열에게 독립선언서를 전달하고, 이들과 시위에 필요한 태극기를 제작하여 사람들에게 배포했죠. 그 결과 3월 5일 한강 이남으로는 최초로 군산에서 태극기가 휘날리며 독립을 요구하는 만세 시위가 벌어지게 됩니다.
오늘날 군산시는 한강 이남 최초의 3·1운동이 일어난 사실을 기억하기 위해 <군산 3·1운동 기념 태극기거리>를 조성했어요. 그리고는 태극기와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무궁화로 거리를 가득 채웠습니다. 또한 이곳에 3·1운동 100주년 기념관을 설립하여 태극기를 비롯한 사진과 전시물을 만날 수 있게 도와주고 있답니다.
대구에서 일어난 3·1운동도 이갑성과 연관되어 있어요. 계명대 대구동산병원 뒤편 청라언덕 입구 교각 아래 벽면에는 교복을 입은 학생들을 중심으로 많은 한국인이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을 외치는 벽화가 그려져 있어요. 반대편에는 독립 유공자 성함과 선언문이 기록되어 있고요. 그리고 청라언덕과 계산성당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3·1만세 운동길이라 불러요.
이곳에서 만세 시위가 일어난 것은 이갑성이 2월 24일 대구의 지도자들을 만나 3·1운동 계획을 알리며 동참해달라고 부탁하면서 시작돼요. 이에 대구의 이만집 목사 등 기독교 지도자와 계성학교 백남채 교사 등이 중심이 되어 3·1 만세운동을 준비하게 돼요. 3월 2일 독립선언서를 받은 이만집 목사는 계성학교 아담스관 지하실에서 태극기와 독립선언문을 제작한 뒤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배부했어요.
3월 8일 오후 1시 경 태극기를 손에 든 대구고보 학생 200명이 만세를 외치며 거리로 나가자, 많은 사람이 동참하면서 금세 1,000여 명으로 늘어나게 됩니다. 대구시는 이 당시의 선조들의 마음을 기억하기 위해 이곳에 수십 개의 태극기를 게양하며 기리고 있어요. 그리고 이 모습을 보러 수많은 사람이 대구의 3·1만세 운동길을 찾아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