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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묻고 답하기 첫번째

by 유정호

인조는 왜 광해군을 내쫓는 반정을 일으켰나요?

인조는 왕암에서 왕의 기운이 나온다고 하여 경희궁을 짓기 위해 내쫓았던 선조의 다섯째 아들인 정원군의 아들이에요. 인조는 동생 능창군이 역모죄로 죽자 광해군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고 서인 김자점과 이괄 등과 반정을 도모합니다. 하지만 과정이 순탄치는 않아서 거사가 발각되기도 했죠. 다행히도 김자점이 후궁에게 청탁을 넣어 무마시키면서 1623년 1,400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반정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반정의 이유가 개인적인 원한이 컸던 만큼 국가와 백성을 위하는 마음이 적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또한 반정을 성공시킨 사람들을 공신으로 선정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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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문제가 생겼나요?

반정 당일 군대를 통솔하기로 했던 김유가 두려워 나오지 않자, 이괄이 군대를 통솔해 거사를 진행했죠. 거사가 성공할 것이 확실해지자 뒤늦게 김유가 합류하면서 지휘권을 두고 이괄과 다툼이 생깁니다. 문제는 반정 이후 공신을 책정하는 과정에서 이괄이 김유보다 한 등급 아래인 정사공신 2등에 봉해집니다. 그래도 이괄은 만약에 있을지 모를 후금의 침입을 대비하여 평안부사 겸 부원수가 되어 평안도 영변에서 군사훈련에 매진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이괄이 반역죄로 고발됩니다. 인조는 처음에는 이괄을 경계하며 무마하려 했지만, 결국 이괄의 아들을 한양으로 압송하라며 금부도사를 파견합니다.


이괄이 아닌 아들을 왜 압송하라고 했나요?

이괄이 북방에서 군대를 통솔하는 만큼 혹시라도 반역을 일으키지 않을까 걱정하며, 이괄의 아들을 인질로 삼으려고 한 거죠.


가족을 건드린 만큼 이괄이 가만 있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맞습니다. 이괄은 그동안의 불만을 터트리며 군대를 이끌고 한양으로 진격해요. 인조는 급히 이괄의 아내와 동생을 처형하며 저지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와서 이괄은 더욱 속도를 내어 한양 가까이에 오게 되죠. 이괄의 군대를 막을 힘이 없던 인조는 급히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하는 동시에 공주로 다급하게 피신합니다. 이괄은 인조를 붙잡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한양을 점령하고는 선조의 아들 흥안군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며 새 왕조가 열렸음을 공포하죠.


공주에는 인조가 벼슬을 내려준 나무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인조는 6일 정도 공주 공산성에 머무르는 동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어떻게 왕이 되었는데, 이토록 허무하게 쫓겨났으니 가슴이 매우 답답했을 겁니다. 그런데 이 마음을 누구에게 털어놓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공산성에 있던 두 그루의 나무를 부둥켜안고는 울면서 한없이 넋두리했다고 합니다. 이후 이괄의 난이 진압되자, 인조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준 두 그루의 나무가 너무도 고마워서 정3품의 통훈대부직을 내려줍니다. 아쉽게도 두 그루의 나무는 오늘날 볼 수 없고, 그 자리에는 영조 때 관찰사였던 이수항이 두 나무를 기리며 지은 쌍수정이라는 정자를 만날 수 있습니다.


인조가 백성들에게 좋은 왕이었나 봐요.

인조는 선조와 더불어 조선 시대 백성보다는 자신을 먼저 챙겼던 최악의 군주로 뽑히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이와 관련한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인조가 공산성에 도망쳐오자 공주의 한 농부가 급히 떡을 만들어 인조에게 갖다 바쳤습니다. 인조는 마음을 졸이며 도망치느라 제대로 먹지 못했던 만큼 농부가 갖다 바친 떡이 맛있었겠습니까. 게 눈 감추듯 떡을 맛있게 먹은 인조는 그제서야 자신이 먹은 떡의 이름이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신하 중 어느 누구도 알지 못했죠. 다만 임씨 성을 가진 농부가 가져왔다는 사실만 알뿐이었습니다. 결국 인조는 임씨가 갖다 바친 떡이라는 뜻으로 임절미라 불렀고, 이것이 시간이 흐르면서 오늘날 우리나라 떡의 대명사인 인절미가 된 거죠.


그런데 이런 비슷한 이야기가 선조에게도 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피난길에 오른 선조도 제대로 식사를 못 하는 상황에서 백성이 바친 생선을 맛있게 먹습니다. 그제서야 배가 부른 선조는 너무도 맛있는 생선 이름이 궁금해서 물어봤고, 묵어라는 답변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토록 맛있는 생선 이름이 묵어라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선조는 당장 생선의 이름을 묵어가 아닌 금은보화할 때 은을 뜻하는 한자를 사용하여 은어라 부르게 하죠. 이후 임진왜란이 끝나고 평화로운 시기를 맞이한 선조는 그 당시 맛있게 먹었던 은어가 먹고 싶어졌죠. 그러나 다시 맛본 은어는 그토록 그리워했던 맛이 아니었습니다. 이에 선조는 이렇게 말했다고 하죠. 도로 묵이라고 불러라..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잘 아는 말짱 도루묵이란 말이 여기서 나왔죠.


두 이야기는 백성을 버리고 도망친 왕이었지만, 백성들은 충심을 다해 음식을 갖다 바쳤다는 공통점이 있죠. 보통의 사람이라면 가장 어려울 때 도와준 사람을 잊지 않으며 감사하는 것이 상식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정작 선조와 인조의 이야기에는 음식을 바친 사람의 이름이 남아있지 않죠. 이것은 그저 자신의 안위만 중요하게 여겼던 두 왕의 모습을 보여줄 뿐입니다. 여러분이 인조였다면 자신이 부둥켜안고 울었던 나무가 아닌 떡을 갖다준 농부에게 포상을 내려주는 것이 정상이지 않았을까요.


안타까운 이야기네요. 이야기 속에서 힌트가 나왔는데 이괄의 반정이 오래가지 못했나 봐요?

네. 이괄의 반정군을 쫓아 내려온 도원수 장만이 정충신의 의견을 따라 도성 서쪽 돈의문 밖 도성을 내려다볼 수 있는 지역을 점령하며 전투가 벌어집니다. 초기에는 장만이 이끄는 관군이 불리했지만, 이괄의 장수를 회유하며 병력을 감소시키는 데 성공해요. 또한 전투 중에 갑자기 바람의 방향이 도성으로 바뀌면서 아래쪽에 있던 이괄의 부대는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패배하게 됩니다. 결국 이괄은 패배 후 도망치다가 휘하 군관에게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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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괄의 난이 후금이 조선을 침략하는 원인이 되었다면서요?

이괄의 부하 중 일부가 후금으로 도망쳐서 인조반정의 부당함을 피력합니다. 후금의 입장에서는 아주 좋아할 만한 소식이었죠. 그렇지 않아도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서 조선을 봉쇄해야 하는 후금은 이를 명분으로 삼으며 조선을 침략하게 됩니다. 이것이 정묘호란이죠.


누르하치가 죽고 왕위를 계승한 홍타이지 청 태종은 1627년 1월 아민을 총대장으로 삼고 3만의 군대로 조선을 침략합니다. 도원수 장만이 막으려 했지만, 역부족이어서 후금의 군대는 파죽지세로 내려옵니다. 이에 인조는 급히 강화도로 피신하고, 소현세자는 전주로 내려보냅니다. 조선을 정복하기보다는 후금의 위세를 보여주는 데 목적이 컸던 후금은 전쟁이 장기전으로 가는 것을 경계하며 정묘약조를 맺고 군대를 철수시킵니다. 이때 최명길의 활약이 커서 조선에게 매우 유리한 조약을 맺게 됩니다. 후금군대가 철수하고 이후 압록강을 넘지 않는다. 양국은 형제국이 된다. 조선은 명나라와 적대하지 않아도 된다는 내용과 함께 공물도 보내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하지만 인조와 권력을 장악한 다수의 서인 출신 관료들은 오랑캐라 낮춰보던 후금과 형제가 되었다는 사실에 불만을 계속 표출하면서 후금과의 관계를 불편하게 만듭니다. 이후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해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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