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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 묻고 답하기

by 유정호

효종은 소현세자의 동생이죠?

청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고국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은 소현세자의 동생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즉위합니다. 봉림대군도 청에 끌려갔지만, 청을 바라보는 시선이 소현세자와는 너무도 달랐죠. 병자호란의 설욕을 갚고 명나라를 다시 세우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이것을 북벌이라고 하죠. 이런 점이 인조에게 매우 큰 만족을 주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 결과 소현세자가 죽고 5개월 뒤에 세자로 책봉됩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불만과 의문을 품은 사람도 많았어요. 왜냐하면 소현세자의 아들이 계승하는 것이 보편적이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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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은 북벌을 위해 어떤 노력을 했나요?

우선 자신을 왕으로 추대했던 김자점 등 청나라 우호적인 관료들을 내치고, 송시열을 비롯한 주전을 외치는 사람들을 자신의 곁에 결집합니다. 북벌을 위해서는 군대를 유지하는 등 막대한 자금이 필요한 만큼 대동법을 확대해 세수를 늘려갑니다.


또한 병자호란에서 패배한 이유를 분석하며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갑니다. 우선 피난처로 사용하던 강화도와 남한산성을 재정비합니다. 특히 남한산성 일대를 방비하는 수어청과 한양과 왕을 호위하는 어영청에 유능한 장수를 배치하여 전력을 강화시켰죠. 또한 청나라의 주력부대인 기병을 상대하기 위해 왕을 지키는 금군을 기병으로 편제하고, 어영청에 기마부대인 별마대와 포병부대인 별파진을 새로 조직합니다. 이런 노력 끝에 금군은 1천 명, 어영청군은 2만 1천 명, 훈련도감군은 6,350명까지 늘어납니다. 이뿐만이 아니었죠.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의 홍이포의 위력을 실감했던 효종은 네덜란드인으로 조선에 귀화한 박연을 훈련도감에 배속해 무기 제조를 맡깁니다.


네덜란드인이 귀화했다고요? 박연이 우리가 알고 있는 하멜인가요?

하멜보다 먼저 조선에 도착한 네덜란드인입니다. 이 시기는 일본으로 무역하러 가는 서양인들이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조선 땅을 밟는 일이 종종 도착하곤 했어요. 박연의 원래 이름은 벨테브레이로 인조 때인 1627년 일본을 향하던 중 표류하다가 제주도에 도착해요. 죽다 살아난 박연은 식수를 구하려다가 붙잡혀 부산에 있는 왜관으로 보내져요. 왜냐면 조선에 불시착한 외국인들은 왜관을 통해 중국이나 일본으로 보내는 것이 관례였거든요. 하지만 그해는 정묘호란이 일어나서 오랜 시간 시간이 지체된데다 일본도 이들의 입국을 거부하면서 고향으로 돌아갈 길이 끊기고 맙니다. 그러는 사이 이들이 대포를 만들 수 있다는 조정에 알려지자, 인조는 이들을 한양으로 불러 훈련도감에 배치해요. 그러나 병자호란 때 두 명이 죽고 박연만이 살아남았죠. 이후 박연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조선에 귀화한 뒤 무과 시험에 응시해 합격한 뒤 당당히 조선의 관리가 됩니다.


북벌을 준비하는 효종에게 있어 서양 대포를 만들 수 있는 박연은 매우 중요한 인물이 아닐 수 없었어요. 그래서 혹시라도 박연이 조선에서 도망칠까 조선 여인과 결혼을 시켜요. 박연은 여인 사이에서 1남 1녀를 낳으면서 원산 박씨의 시조가 됩니다. 기록에 따르면 박연이 낳은 자식은 조선인과 네덜란드인을 반씩 섞어놓은 모습이었다고 해요. 그래도 박연은 고향이 늘 그리웠을 겁니다. 그때 마침 네덜란드인 하멜 일행 36명이 제주도에 불시착하게 돼요.


박연과 하멜과는 사이가 매우 좋았나요?

사실 그렇게 좋았다고도 볼 수 없습니다. 하멜의 기록에 따르면 조선에 오래 머문 박연이 모국어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해 의사소통이 어려웠다고 해요. 그래도 박연은 하멜 일행이 얼마나 반가웠던지 옷깃이 다 젖을 때까지 펑펑 울었다고 해요. 박연은 하멜 일행이 자신과 조선에서 오래 살기를 바랐지만, 하멜 일행은 무슨 일이 있어도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수시로 탈출을 시도했으니까요. 나중에 하멜이 일본으로 탈출한 뒤 협상을 통해 조선에 남아있는 일행을 데려갈 때도 박연은 같이 가기를 거부합니다. 저라도 박연처럼 행동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그렇다면 우리에게 하멜보다 박연이 더 잘 알려져야 하지 않나요?

하멜 일행은 북벌을 준비하던 효종 때에는 조선에서의 탈출이 불가능했어요. 훈련도감에서 일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지방으로 쫓겼나 구걸로 생계를 유지할 정도로 힘든 시절을 보냈죠. 하지만 효종이 죽고 북벌 계획이 무산되면서 감시가 소홀해지자, 하멜은 일본으로 탈출하여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겠죠. 어렵게 고국으로 돌아간 하멜은 13년 이상 밀린 봉급을 받기 위해 그동안 있었던 보고서를 작성하여 제출해요. 이것이 서양인들에게 조선을 알리게 되는 큰 역할을 한 <하멜표류기>에요. 또한 당시 조선의 모습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우리에게도 의미가 있어요. 보고서에 따르면 ‘50~60년 전에는 그들은 담배에 대해 전혀 몰랐다. 일본인들이 담배 재배술과 사용법을 알려주었고, 이후 여자들은 물론이고 네댓 살 되는 아이들도 담배를 피운다.’처럼 생소한 이야기들을 알려주죠. 그래서 박연보다 하멜이 더 유명해지게 된 것이랍니다.


효종은 이토록 북벌을 위한 노력을 펼쳤는데 어떤 결과를 얻었나요?

북벌에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나선정벌 과정에서 조선군의 용맹함을 청나라에 확인시켜줍니다. 1650년대 러시아가 만주 흑룡강 일대까지 진출하면서 청나라와 국경을 마주하게 됩니다. 청나라는 만주를 지키기 위해 조선에 군대 파평을 요청하면서 효종은 두 차례 병력을 파견하게 됩니다. 1차는 변급이 150여 명의 병력으로 모란강 상류 지역의 영고탑에서 청군과 합류하여 교전을 벌입니다. 이때 조선군은 버드나무로 만든 방패에 몸을 숨기고는 사격하는 방식으로 러시아군이 사용하던 화기보다 3배 이상 느린 화승총으로도 한 명의 사상자 없이 러시아군을 격퇴하는 전과를 거둡니다. 2차는 조선군의 위력을 확인한 청의 재요청으로 신유가 260여 명의 병력으로 재출병하죠. 선봉에 나선 조선군은 러시아를 상대로 선전하며 전선을 불태우려 했으나, 전리품 획득에 눈이 먼 청나라 장수 사이호달에 의해 제지당해요. 이 과정에서 조선군 7명이 숨지며 패배할 뻔했지만, 조선군의 활약으로 승리를 거둡니다. 그러나 사이호달은 미안함도 없이 조선군이 확보한 러시아 소총을 모두 빼앗고 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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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효종 시절 군인만이 아니라, 온 국민이 전쟁을 위한 노력을 펼쳤다고 하던데요?

그때의 노력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예전에 결혼하면 이불 색깔이 붉은색과 푸른색이지 않았나요? 이것은 효종의 아내 인선왕후가 북벌을 위해 이불의 색을 적색과 청색 2가지 색으로 통일하도록 한데 있어요. 전쟁이 일어나면 이불을 군복으로 활용하기 위해서였죠. 백성들도 이를 따르면서 아주 오랫동안 우리의 전통이 되었죠.


그런데 왜 북벌은 실패했나요?

직접적인 원인은 효종이 머리에 난 종기에 침을 맞다가 피를 너무 많이 쏟으면서 재위 10년 만에 죽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조선의 국력으로 북벌은 불가능한 일이었고, 관료들이 정치권력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북벌을 이용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북벌을 통해 주변 국가에 복속되지 않는 자긍심을 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국정 운영에서 명분보다 실리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배우기도 합니다. 만약 효종이 북벌이 아닌 소현세자처럼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면 조선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생각해보게 되네요. 아마도 효종의 재위 기간은 어디에 초점을 두느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질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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