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이 장희빈의 아들을 원자로 삼는다고 하자, 서인의 반발이 컸다면서요. 그 후 어떻게 되었나요?
숙종은 서인의 반발에 아랑곳하지 않고 종묘사직에 장희빈이 낳은 아들을 원자로 책봉했음을 알려요. 그럼에도 송시열이 강하게 반발하자 송시열의 관작을 삭탈하고 제주도로 유배 보내요. 얼마 뒤 송시열에게 한양으로 올라오라고 명령해요. 그리고 다시 명령을 바꾸어 사약을 내려 정읍에서 죽여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서인 출신 관료들을 대거 유배 보내고는 남인 출신 관료를 임명합니다. 이렇게 국왕이 일시에 인사권을 크게 휘둘러 관직을 대거 교체하는 것을 환국이라고 했잖아요. 이것을 기사환국이라고 해요. 숙종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인현왕후를 질투와 투기를 부린다는 이유로 폐비하고 장희빈을 왕후로 책봉해요.
장희빈에 숙종이 휘둘린 것이 아니네요. 숙종의 강한 의지가 반영된 결과였네요. 하지만, 장희빈도 왕비의 자리에서 오래가지는 못하잖아요?
맞습니다. 장희빈이 낳은 아들이 훗날 경종이 돼요. 경종이 세자가 되면서 장희빈이 왕비로 책봉되었죠. 문제는 장희빈이 집안이 사회적 물의를 많이 일으키기 시작했다는 점이에요. 장희빈의 오빠 장희재는 온갖 부정된 일을 저질렀어요. 장희빈의 아버지, 조부, 증조부에게 영의정, 우의정, 좌의정으로 추증하면서 중인 출신이던 집안을 명문가 집안으로 만들죠.
하지만 4년 뒤 남인의 권력이 비대해짐을 경계하는 숙종은 다시 갑술환국을 일으킵니다. 서인이 인현왕후를 복위시키려고 준비하고 있으니 가만히 두어서는 안 된다면서 남인이 수십 명의 서인을 체포해 국문을 열어요. 이런 모습이 눈에 거슬렸던 숙종은 다시 남인을 내치고 서인을 중용하죠. 이 과정에서 장희빈이 인현왕후와 영조의 어머니인 숙빈 최씨를 죽이기 위한 기도와 주술을 했다는 이유로 42살에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때 야사에서는 장희빈이 사약을 마시기 직전 걱정되어 찾아온 경종의 사타구니를 꽉 쥐어서, 훗날 경종이 아들을 낳지 못하는 몸이 되었다고도 해요.
인현왕후도 왕비로 복위하지만, 오래 살지는 못했죠?
네. 맞습니다. 인현왕후 복위와 관련하여 재미난 이야기가 경상도 울진에 있는 불영사라는 사찰에 전해져와요. 이야기에 따르면 궁에서 쫓겨난 인현왕후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을 결심하고 독약을 준비해요. 하지만, 막상 죽으려 하니 너무도 억울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다가 지쳐 쓰러져요. 이때 인현왕후의 꿈에 한 노승이 나타나서는 “저는 불영사의 승려입니다. 지금 목숨을 끊지 말고 3일만 더 참으면 좋은 일이 생길 것입니다. 그때까지 부처님께 정성스럽게 기도하십시오.”라고 말하는 거예요. 힘든데 위로받으면 힘이 나잖아요. 인현왕후는 자살하려는 마음을 접고 어떻게든 살겠다고 다짐해요.
그리고 3일 뒤 거짓말처럼 인현왕후는 왕비로 복귀돼요. 왕비가 되어 숙종을 만난 인현왕후는 꿈에서 나타난 노승을 이야기했고, 숙종은 노승이 궁금해서 불영사의 승려 얼굴을 모두 그려오게 했어요. 하지만 노승의 모습이 없었죠. 숙종은 다시 불영사에 머물렀던 모든 승려의 화상을 그려오게 해요. 인현왕후는 수많은 그림 중 하나를 가리키며 연신 눈물을 흘리며 감사하다는 말을 되뇌었어요. 숙종이 누군지 묻자, 200여 년 전 불영사에서 머물렀던 양성법사라는 답변을 받아요. 인현왕후의 목숨을 살려준 것이 고마웠던 숙종이 불영사 주변 10리 땅을 시주하며 은혜를 갚아요.
재미있는 일화네요. 숙종은 영토하고도 크게 관련되어 있다고 들었어요.
숙종은 백두산과 독도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어요. 우선 울릉도와 독도 이야기부터 할게요. 울릉도와 독도는 512년 신라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하면서 우리 영토가 됩니다. 그러나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이 너무 거세자, 고려 정부는 울릉도에 사는 백성을 보호하고자 모두 뭍으로 건너와 살게 했어요. 조선이 건국되고 대외관계가 크게 안정되자, 많은 사람이 울릉도와 독도로 터전을 옮겼어요. 이에 태종과 세종은 여러 차례 육지로 그들을 불러들여 아무도 살지 못하게 했어요. 이후 울릉도와 독도는 물고기를 잡는 곳으로 변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의 영토임에는 틀림이 없었죠.
그러던 숙종 19년 되던 해인 1693년 어부 안용복이 울릉도로 조업을 나갔다가 일본에 끌려가요. 안용복은 일본 호키주 태수에게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강력하게 주장했고, 일본 태수도 이를 인정하며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 영토가 아니라는 확인 문서를 내줍니다. 이후 숙종은 울릉도와 독도의 중요성을 알고 현지를 조사하고는 에도 막부와 협상을 벌여요. 다시는 울릉도와 독도는 영원히 조선의 영토로, 일본인은 다시는 울릉도 인근에서 조업하지 않겠다고 말이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안용복은 관리를 사칭하여 일본으로 건너간 일로 유배 보내지게 돼요.
그런데 일본은 1600년 자신들이 먼저 독도를 발견했고, 독일전쟁 당시 독도가 주인 없는 섬이라 차지했다고 주장해요. 광복 이후로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독도를 돌려주라는 문구가 없으므로 여전히 자신들의 영토라고 주장하죠. 그래서 512년 지증왕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복하면서 우리 영토가 되었고, 숙종 때 일본 에도막부로부터 독도가 조선 땅이라는 사실을 확인받았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면 좋겠어요.
백두산은요?
병자호란 이후 청과의 국경선에는 크고 잦은 무력 충돌이 계속 일어났어요. 만주족이 중국 본토로 이동하면서 만주에 아무도 살지 못하게 하자, 이곳은 귀한 약재와 짐승이 넘쳐났어요. 이것은 조선인은 만주를 기회의 땅으로 여기며 이곳으로 넘어가는 일이 잦아졌어요. 청은 조선과의 국경선을 확실히 해야 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목극등을 파견해요. 조선은 청나라 사신 목극등을 수행하여 백두산에 올라 국경선을 확정 짓게 됩니다. 사실 조선의 입장보다는 청의 입장이 크게 작용했죠.
이때 목극등은 압록강과 토문강을 경계로 국경선을 그어요. 그리고는 백두산 정상에서 남동쪽으로 4km 떨어진 지점이 물이 두 갈래로 나누어지는 곳에 영토 경계선을 표시하는 백두산정계비를 세웠죠. 압록강은 확실하지만, 토문강은 같은 이름을 가진 것이 있을 뿐 아니라 물이 지상에 흐르지 않아서 토문강이 송화강의 한 지류임을 보여주기 위해 돌과 흙으로 돈대를 쌓아 표시해요.
그런데 고종 때 간도 지역을 청과 마찰이 생기죠. 조선은 김윤중과 김우식을 파견하여 간도를 우리 영토라는 근거를 조사한 뒤 청과 러시아에게 국경선을 정리하자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약소국이던 조선의 요구를 모두가 말살해 버렸죠. 그런 가운데 을사늑약으로 일제에 외교권을 빼앗겨요. 이후 일제는 남만주 철도부설권을 얻는 대가로 간도를 청나라에 넘겨줍니다. 이후 누군가에 의해 백두산정계비와 토문강 위치를 표시해 놓은 돈대도 사라지고요. 을사늑약이 무효이기에 간도를 넘겨준 간도협약도 무효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되돌려줄 생각을 하지 않죠. 물론 중국의 영토가 된 지 오랜 시간이 흘러 간도협약을 되돌릴 수 있는 시간도 지나고 우리의 영토로 되찾아올 확률은 매우 낮아요. 하지만 이런 역사를 알고 있어야겠죠.
중국은 이를 두려워하여 중국 내 사는 소수민족의 역사는 모두 중국의 역사라는 대전제 아래 고구려, 발해의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만드는 동북공정을 아주 오랫동안 진행하고 있어요. 중국과 일본의 억지 주장에 맞서 우리가 피해 보지 않으려면 우리는 역사를 바로 알 필요가 있어요. 그런 중요한 역사에서 숙종이 가지는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