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가 영조의 첫째 아들이 아니었다고요?
영조는 정성왕후와 정순왕후 두 명의 왕비에게서 자식을 낳지 못했어요. 4명의 후궁에게서만 2남 7녀를 봤을 뿐이었죠. 그런데 첫째 아들이던 효장세자가 9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죽으면서 영조는 아주 오랫동안 후사를 이을 왕자를 생산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큰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그럼 사도세자는 영조의 둘째 아들인 거네요.
그렇죠. 영조가 41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후궁 영빈 이씨에게서 낳은 아들이 사도세자입니다. 당시 국왕의 평균수명이 46~47세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아주 큰 경사였을 겁니다. 조선을 이어갈 왕자를 생산했다는 것이 말입니다. 그래서 후사를 잇게 하도록 젖도 떼지 못한 사도세자를 영빈 이씨에게서 떼어내 중전의 양자로 입적시킵니다. 그로 인해 사도세자는 어머니의 체온과 사랑을 온전히 느끼지 못한 채 궁녀와 환관들의 손에 키워지게 됩니다.
교육 용어 중에 결정적 시기가 있습니다. 어린 시절에 학습되지 않으면 성인이 되어서도 배우지 못한다는 말인데요. 여기에는 사랑과 같은 심리적 행동이 포함되어 있어요. 갑자기 결정적 시기를 이야기하는 것은 사도세자가 어린 시절 생모로부터 충분한 교감을 나누지 못한 것이 이상증세를 보이는 원인 중의 하나일 수 있다는 점입니다.
맞아요. 영조와 사도세자는 매우 사이가 나빴잖아요. 사도세자가 어릴 때부터 그런 건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영조는 늦게 본 아들인 만큼 누구보다 사도세자를 예뻐하고 자랑스러워했어요. 사도세자도 어린 시절 영민함을 보여주면서 영조의 자랑거리가 되었고요. 예를 들어 2살 때 글자의 의미를 이해하여 왕이라는 글자를 보고 영조를 가리키고, 세자라는 글자를 보면 자신을 가리켰다고 해요. 이것은 일반 아이들도 다 하는 것으로 유난 떤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러면 조금 더 이야기해 볼게요. 글자도 쓸 줄 알아서 ‘천지왕춘’을 종이에 써 내려가자, 대신들이 앞다투어 종이를 가지려 했다고 해요.
이것만이 아니죠. 천자문에서 사치를 뜻하는 한자를 보고는 자신이 입고 있던 옷과 구슬로 장식한 모자를 벗어버리고, 영조가 비단과 무명 중 무엇이 더 낫냐는 질문에 백성에게 필요한 무명이 비난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영조가 부르면 입에 있던 음식을 뱉고 대답할 정도로 예의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니 기대가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갑니다.
그토록 사이좋던 둘이 어쩌다가 틀어지게 되었나요.
모든 일은 하나의 원인으로 발생하지는 않지요. 영조와 사도세자의 불편한 관계, 더 나아가 사도세자가 죽는 과정을 많은 사람이 다양한 관점과 해석으로 설명하고 있어요. 그중에서 저는 교육적인 측면에서 접근하고자 합니다.
부모의 기대는 부모가 생각하는 것보다 자식에게 더 큰 부담을 줘요. 영조는 어려서 영민함을 보여주었던 사도세자에 큰 기대를 걸었어요. 자신보다 더 뛰어난 군주가 되어 조선을 경영하기를 원했죠. 문제는 이때 칭찬보다는 질책을 더 많이 한 거죠. 또한 노력하지 않는다며 사도세자의 말과 행동을 믿지 않았어요. 예를 들어 13살의 사도세자에게 한나라 무제와 문제 중에 누가 더 훌륭한지를 물어요. 사도세자가 예와 덕으로 나라를 다스린 문제라고 답하지만, 영조는 끝까지 자신을 속이고 있다고 화를 내요.
사도세자 또한 10대에 들어서면서 사춘기가 오자 영조의 과도한 기대와 질책을 크게 힘들어합니다. 이를 벗어나기 위해 글공부보다는 무예 익히는 걸 즐겼죠. 그 결과 영조와 사도세자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아쉬움과 원망의 눈길만 보내는 부자지간이 됩니다.
비단 그것만으로 영조와 사도세자의 사이를 설명하기는 어려울 듯해요.
예리하십니다. 영조는 평생 형을 죽였다는 의심의 눈초리를 받았다고 했잖아요. 이를 벗어나기 위해 사도세자를 이용한 것도 하나의 원인이 됩니다. 사도세자가 4살이 되던 해부터 시작해서 8번이나 왕위를 물려주겠다는 선위 의사를 밝혀요. ‘나 왕 하고 싶어서 하는 거 아냐. 이제 왕이 될 사도세자가 있으니, 언제든 물러날 수 있어.’라고 말하는 거죠. 하지만 이때마다 사도세자는 무릎을 꿇고 선위를 철회해달라고 빌어야 했어요. 아버지를 내쫓고 왕이 되는 일은 절대 없다는 자신의 의지를 보여야 했거든요.
사도세자는 대리청정하는 동안에도 자신을 믿지 않는 영조와 자신을 허수아비 취급하는 관료로 자존감이 떨어졌어요. 결국 부담감을 이기지 못한 사도세자는 몸이 아프다며 정무를 제대로 돌보지 않았고, 몇 달 동안 영조에게 문안 인사를 올리지도 않았죠. 이런 행동은 영조를 더 화나게 했고, 영조가 화를 내면 사도세자는 졸도하는 등 두려움을 느끼고 회피하는 행동을 반복해요. 그러다가 사도세자는 병을 핑계로 영조를 속이고 관서 지역을 몰래 유람하고 와요. 넉 달 후 이 사실을 알게 된 영조는 사도세자를 도운 내시를 유배 보내고, 사실을 감춘 승지를 파직해 버리죠.
그렇다고 영조도 잘한 것은 아니었어요. 영조도 사도세자와 말을 나누고 나면 항상 듣지 못할 나쁜 말을 들었다며 물로 귀를 씻었어요. <시경>에서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고 볼품없는 삶을 살아가는 자식이 반성한다는 내용이 담긴 <육아시>를 신료들 앞에서 읽게 하고요. 얼마나 기분 나쁘고 수치스러웠겠어요. 그래서일까요? 사도세자가 답답한 마음에 옷도 입지 못하거나, 궁인을 해치는 등 정신질환을 앓는 사람처럼 행동합니다.
사도세자가 정신질환 때문에 왕이 될 자격이 없다고 보고 죽인 건가요?
그것은 아닌 것 같아요. 사도세자는 대리청정 기간 소론 출신 관료를 처형해야 한다는 노론의 의견을 들어주지 않았어요. 노론이 중요하게 여기는 송시열, 송준길, 김창집의 배향을 거부했죠. 영조는 권력을 쥐고 있는 노론과 잦은 마찰을 일으키는 사도세자로 깊은 고심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던 찰나 1762년 나경언이 사도세자의 잘못 10가지를 고발해요. 화가 난 영조는 직접 국문을 열어 나경언을 참형에 처하고, 고변서는 불태워버려요. 그로 인해 나경언이 어떤 내용을 적었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역모를 비롯한 굵은 죄명이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사도세자는 자신이 역모를 꾀했다는 고변서로 국문이 열렸다는 소식을 듣자, 영조에게 용서를 빌어요. 하지만 영조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불안감에 미쳐 날뛰기 시작했죠. 이때 사도세자의 친모인 영빈 이씨가 영조를 찾아가 세손만이라도 살려달라고 애원합니다. 만일 역모죄라면 사도세자만이 아니라 손자인 정조까지 죽을 수 있는 사안이었으니까요.
영조는 어떤 결정을 내렸나요?
영조는 사도세자를 휘령전으로 불러서는 자결을 명합니다. 울부짖으며 살려달라고 외치던 사도세자가 모든 걸 포기하고 죽으려는 것을 신하들이 말리자, 뒤주로 추정되는 물건 안에 가둬버려요. 부인 혜경궁 홍씨부터 어느 누구도 말리지 않았죠. 오로지 어린 정조만이 살려달라고 부르짖을 뿐이었어요. 그러나 영조의 어명으로 어린 정조는 현장에서 끌려 나가게 됩니다. 그리고 8일 뒤 사도세자는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후 영조는 죽은 아들의 시호를 사도세자로 정하고, 정조는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시켜 보위를 잇게 했죠. 그리고 14년을 더 살면서 정조가 왕이 될 수 있도록 지지해 주고 지켜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