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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 묻고 답하기

by 유정호

순조는 정조가 죽으면서 어린 나이에 국왕으로 즉위했죠?

네. 맞습니다. 순조는 11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국왕으로 즉위하게 됩니다. 사실 재위 기간 주도적으로 국정을 이끌기보다는 회피하고 미루는 모습을 많이 보여준 왕입니다. 그렇다 보니 국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노력도 여기저기 보입니다. 예를 들어 순조가 태어날 무렵 많은 궁중 사람이 용꿈을 꾸면서 장차 성군이 될 것이라고 입을 모아 말했다고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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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살이면 직접 국정을 운영하지 못하지 않나요? 누가 대신 정치를 이끌었나요?

11살이 국정을 이끄는 것은 사실 불가능에 가깝죠. 그래서 영조의 계비였던 정순왕후가 수렴청정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정조에 의해 기를 펴지 못하던 벽파들이 주요 요직을 차지하고는 장용영 폐지 등 정조의 개혁을 모두 중지시켜버리죠. 또한 자신들을 견제할 수 있는 반대 세력 즉 정조와 함께 국정을 이끌어가던 남인과 시파를 제거하는 데 혈안을 올립니다. 이때 내세웠던 명분이 서학 즉 천주교 박해입니다.

우선 정치 보복을 감추기 위해 서학을 많이 믿던 평민을 대상으로 한글로 된 박해령을 선포하고는 천주교도를 잡아들여요. 이 과정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한 이승훈과 중국인 신부 주문모를 포함한 300명을 체포합니다. 그리고는 천주교 신자라며 정적들을 제거해요. 이 과정에서 우리가 잘 아는 정약용이 유배 가게 됩니다. 이를 신유박해라고 합니다.


어찌 보면 믿음은 어느 누구도 꺾을 수 없는 강력함을 가지고 있잖아요. 반발이 없었나요?

정조도 천주교를 금지했으나, 강하게 억누르지는 않았어요. 그렇다 보니 천주교 신자들은 신유박해에 매우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강원도와 경기도 오지로 숨어들어 믿음을 이어 나갔죠. 그런 가운데 나라를 발칵 뒤집는 황사영 백서 사건이 벌어지게 됩니다.

16살에 사마시에 합격해 진사가 될 정도로 총명한 인물로 정약용의 큰형 정약현의 사위인 황사영은 길이 62cm, 너비 38cm의 흰 비단에 1만 3,311자를 적어요. 조선의 교회 현황과 신유박해의 과정을 적은 뒤, 청나라 황제에게 조선에 압력을 넣어 서양인 선교사를 받아들이게 하거나, 조선을 청나라 영토로 편입시켜달라고 말이죠. 이것이 힘들다면 서양 군대를 조선에 파견해 신앙의 자유를 보장해달라고 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종교의 자유를 위한 신념이었을지는 몰라도, 사회적으로는 외세를 끌어들여 나라를 위태롭게 만드는 매우 위험할 일이죠. 또한 이것은 역모이기도 했고요.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요?

정순왕후와 노론은 천주교를 박해할 명분이 확실해졌죠. 그러나 중국인 신부 주문모의 죽음이 외교적 문제로 확대되는 것을 우려해서 백서 내용을 축소, 왜곡하여 청나라에 보내는 것을 마무리 짓습니다. 백서는 훗날 한양 주교로 있던 뮈텔이 1925년 교황에게 바쳤고, 교황은 로마교황청 민속박물관에 보관하고는 200부를 복사하여 주요 가톨릭 국가에 배포했어요.


어린 순조는 매우 놀랐겠어요. 그런데 더 큰 일이 벌어진다고요?

성인이 된 순조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조선을 경영하고자 했어요. 재정, 군제, 토지에 관한 내용을 정리한 <만기요람>을 편찬하고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부정·비리를 근절하려는 노력을 펼쳤지만, 그 의지는 오래가지 못해요. 우리에게 너무 잘 알려진 홍경래의 난으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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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래는 사극 드라마에서 주요 소재로 사용되고 있죠. 예전 구르미 가린 달빛에서 김유정이 홍경래의 딸로 나왔던 것처럼 말이죠.

맞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구르미 가린 달빛에서 박보검이 맡았던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도 이야기해야 하거든요. 그전에 홍경래의 난을 설명해드릴게요. 난이 일어난 장소는 평안도예요. 평안도는 청나라와의 무역으로 상업과 광공업이 발달하며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교육 수준도 높았죠. 그러나 조선 내내 지속된 지역 차별로 설움이 가득한 지역이었죠. 여기에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로 수탈도 당하며 불만이 컸지요.

이를 이용하여 몰락한 양반이던 홍경래가 1811년 반란을 일으켰고, 초반 관군을 상대로 승리하며 기세가 등등했어요. 하지만 안주성 공격을 두고 내분이 일어난 상황에서 홍경래가 부상을 입자 정주성으로 퇴각하여 수성에 급급할 정도로 세력이 크게 약화합니다. 관군은 정주성 성벽을 파괴한 뒤 10세 이하의 어린이를 제외한 모든 사람을 죽였다고 해요. 이를 두고 많은 사람이 분개하면서도 절망에 빠졌어요. 관리들이 나라와 백성을 버리고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부정부패를 저질러서 이대로는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아 봉기한 것인데 이토록 잔인하게 진압당했으니 말이에요. 그래도 사람들은 희망을 놓고 싶지 않아서 홍경래가 죽지 않고, 어디선가 다시 세상을 구할 준비를 할 거라고 믿었답니다.


부정부패를 만연했던 이 시대를 세도정치라고 하죠.

왕의 외척이던 안동김씨와 풍양조씨가 국가를 사유물로 전락시켰던 시대죠. 이들은 비변사를 통해 권력을 장악하고는 매관매직을 통해 관리를 임명했어요. 당연히 돈을 주고 산 사람들은 국가와 백성이 안중에 없었겠죠. 어떡하면 투자한 돈을 빨리 회수하느냐, 내 자손도 관직에 나가도록 백성을 수탈할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이들은 법이 정해놓은 절차나 기준은 철저히 무시하고, 전방위적으로 백성들을 수탈했죠. 여기에 월급이 나오지 않는 아전들도 편승하여 백성을 괴롭혀 돈을 뜯어냅니다. 그렇다 보니 오늘날 감찰관에 해당하는 암행어사도 아무 소용이 없었죠. 오히려 암행어사가 오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암행어사도 돈을 주고 사는 관직인 만큼, 이들도 부정·비리를 저지르는 일이 많았어요. 암행어사가 고을에 오면 백성들은 접대비와 뇌물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암행어사의 방문을 항의하는 고을도 많았죠.


순조는 이런 현상을 가만히 보고 있었나요?

홍경래의 난 이후 의욕이 꺾인 순조는 적장자로 태어난 효명세자에게 큰 기대를 걸었어요. 조선시대는 적장자가 가지는 힘이 매우 크다고 자주 말씀드렸잖아요. 효명세자는 숙종 이후 150년 만의 적통이었고, 매우 영민했어요. 순조는 14살의 효명세자에게 왕실 제사 업무를 맡기며 정치를 배우도록 했어요. 38살이 되던 해에는 건강을 내세워 19살의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겨요. 이전 세자에게 인사권과 병권을 제외한 정무만 맡겼던 것과 달리 모든 권한을 다 넘겨주었죠.

효명세자는 안동김씨를 추종하는 신하를 내쫓고는 자신을 지지하는 관료를 중용해요. 호적법을 정비하고 형벌과 옥사를 신중하게 살피며 백성을 위한 정책을 폅니다. 특히 예의와 음악으로써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어요.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조선은 예의와 음악이 정치를 사람들의 중요한 가치이자 척도였거든요. 효명세자는 대리청정 3년 동안 매년 궁중 연회를 개최하여 왕실이 달라졌음과 동시에 위엄을 보여주었어요. 이 과정에서 직접 악장과 가사, 궁중무용 정재무를 만들며 뛰어난 군주의 자질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효명세자는 21살이 되던 해에 갑자기 피를 토하더니 14일 만에 죽고 말아요. 이것은 실낱같이 이어지던 순조의 개혁 의지가 끊어지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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