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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금동대향로 첫번째 이야기

by 유정호


백제금동대향로가 발굴되는 과정에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면서요?
여러분. 충청남도 부여군이 538~660년까지 120여 년 동안 백제의 마지막 수도였던 사비라는 사실을 알고 있나요? 이곳에서 성왕에서 의자왕까지 6명의 국왕이 사비에서 나라를 경영했어요. 그만큼 왕과 왕족들의 무덤도 부여에 많이 있어요. 무덤이 모여 있는 장소를 고분군이라고 하는데, 그중 하나가 부여읍에서 3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능산리 고분군이에요. 오늘날 부여왕릉원이라 불리는 능산리 고분군에 있는 7기의 무덤을 보려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부여군청은 넓은 주차장을 만들기로 했어요.

1993년 10월 부여군청이 능산리 고분군 근처 계단식 논밭에 주차장을 만들기로 결정하자, 국립부여박물관 발굴조사단에서 일하는 한 분이 “이곳은 평소에도 농부들이 논밭에서 나오는 기와들을 골라내야 경작할 정도로 많은 유물이 나오니,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발굴해봐요. 정말 귀중한 유물이 나올지 모르잖아요.”라고 말했어요. 이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며 발굴을 이어갔어요. 하지만, 발굴하는 작업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어요. 밤에는 땅이 딱딱하게 얼어붙었고, 낮이 되면 땅이 녹으면서 논바닥에 물이 흥건하게 고였거든요. 종이컵과 스펀지를 이용해 조심스럽게 물을 제거하며 발굴 작업을 이어가던 중, 12월 12일 금속으로 만들어진 코끼리 형상의 유물이 발견되었어요.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많은 조사원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어요. 우리나라에 코끼리가 살지 않는 만큼 앞으로 자신들이 발굴할 유물이 특별하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거든요.

현장에 있던 조사원들은 도대체 어떤 유물이기에 코끼리 모양이 있을까 너무도 궁금했어요. 동시에 특별한 유물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도굴꾼이 훔쳐 갈까 걱정되었어요. 그게 아니더라도 유물을 보려는 많은 사람이 몰려들면서 유물이 훼손될까 걱정되었어요. 그래서 조사원 모두는 자발적으로 집에 가지 않고 현장에 남아 밤새도록 발굴 작업을 이어갔어요. 조금이라도 빨리 유물을 만나고 싶었지만, 조금의 훼손도 있어서는 안 된다며 최대한 신중하게 작업을 이어 나갔어요. 그 결과 그토록 고대하고 고대하던 백제금동대향로를 진흙투성이에서 꺼낼 수 있었어요. 발견 당시의 백제금동대향로는 뚜껑과 본체가 분리되어 있었지만, 조그마한 손상도 없이 완벽하게 옛 모습 그대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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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금동대향로가 무엇이고 언제 만들어졌어요?
좋은 질문이에요. 우선 유물에 이름을 붙이는 규칙을 알면 백제금동대향로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럼 백제금동대향로 이름을 살펴볼까요? ‘백제’는 유물이 출토된 시기를 말해요. ‘금동’은 유물의 재질을 설명하는 것이고, ‘대향로’는 유물의 용도를 뜻해요. 종합해보면 백제금동대향로란 ‘백제 시대 금동으로 제작된 향을 피우는 그릇’이라는 의미가 되겠죠. 잘 이해가 안 되는 친구를 위해 다른 예로 백제를 대표하는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으로 다시 한번 해볼까요. ‘부여 정림사지’는 부여 지역에 있었던 정림사라는 사찰을 의미해요. ‘오층’은 탑의 높이가 5층을 뜻하고요, ‘석탑’은 돌로 만든 탑이라는 말이에요. 이것을 합치면 ‘부여 정림사라는 사찰에 있었던 오층 규모의 돌로 만든 탑’이라는 뜻이 되겠죠. 어렵지 않죠?

다시 백제금동대향로에 관하여 이야기해 볼까요? ‘향로’란 향을 피우는 자그마한 화로를 의미해요. 불교에서는 향을 태우는 의식을 통해 나쁜 마음을 없애고, 남을 위한 삶을 살아가겠다는 마음을 갖고자 했어요. 그래서 다양한 형태의 향로가 만들어졌지만, 보통 20cm 높이의 크기라는 점은 동아시아 국가들에게서 공통으로 나타나요. 그런데 백제금동대향로는 다른 향로보다 무려 세 배에 달하는 61.8cm의 높이에 11.85kg의 무게를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크다는 의미의 한자 ‘대(大)’를 붙여 대향로라고 불러요. 그렇다면 백제는 이토록 큰 향로를 제작한 것일까요?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사비 시대의 백제 역사를 이해해야 해요.

백제는 서울 지역에서 출발한 고대국가로 근초고왕 때는 한반도를 넘어 중국과 일본에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떨친 강대국이었어요. 그러나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침략을 받으며 국력이 쇠퇴하다가, 475년 장수왕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기고 웅진(오늘날 공주)로 급하게 수도를 옮겨 나라를 유지하게 돼요. 다행히 웅진 시대 여러 왕의 노력으로 백제는 국정을 점차 안정화했어요. 무령왕의 뒤를 이어 국왕으로 즉위한 성왕은 고구려로부터 빼앗긴 한강 유역을 되찾아 옛 영광을 되찾으려고 사비(오늘날 부여)로 수도를 옮겨요.

신라 진흥왕과 동맹을 맺고 고구려를 쳐들어가 한강 하류를 되찾은 성왕은 너무도 기뻤어요. 그러나 기쁨의 순간은 잠시였어요. 신라 진흥왕의 배신으로 한강 하류를 빼앗기고 말거든요. 화가 난 성왕은 태자(훗날 위덕왕)에게 3만의 군사를 주며 신라를 응징하라고 명령했어요. 백제의 공격에 신라도 전력을 다해 관산성에서 맞서 싸우면서 전투는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어요. 이 모습이 안타까웠던 성왕은 고생하는 태자와 군대를 응원하기 위해 몰래 관산성으로 향했어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성왕이 50여 명의 병력만 데리고 관산성으로 출발했다는 정보가 유출되면서 신라군에 사로잡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돼요.

성왕이 죽으면서 급하게 국왕으로 즉위한 위덕왕은 가슴이 너무 아팠어요. 너무도 사랑하고 존경하던 아버지 성왕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생각에 능산리에 사찰을 세워요. 아버지의 영혼을 위로하는 동시에 백제의 모든 사람이 위대한 성왕을 잊지 않기를 바라면서요. 이 과정에서 성왕의 명복을 비는 제사를 지낼 때 필요한 향을 피우기 위해 백제금동대향로를 만들어요. 이걸 어떻게 알 수 있냐고요? 능산리 절터에서 위덕왕이 만들고, 성왕의 딸이 사리를 공양했다는 기록이 적힌 창왕명석조사리감이 발견되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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