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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년간 홍문관 대제학을 지낸 서거정

by 유정호

서울 강북에 ‘사가정길’이 있어요. 그 밑으로는 지하철 7호선 사가정역이 있고요. ‘사가정’은 조선의 문신 서거정(1420~1488)의 호로 용마산 부근에 자신이 좋아하는 매화, 대나무, 연꽃, 해당화를 심어놓고 정자를 지어놓은 것에서 유래한 지명입니다. 서거정은 살아있는 동안 세종부터 성종까지 6명의 왕을 45년 동안 섬기고, 23년간 문형을 지냈어요. 48세에 대제학이 된 이후에는 23차례나 과거시험을 관장하며 조선을 이끌어 갈 인재를 선발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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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거정은 19살에 과거 급제했지만, 25살이 되어서야 벼슬에 올랐어요. 28살에 홍문관 부수찬이 되면서 모두의 부러움을 샀어요. 홍문관에 배치된다는 것은 가문과 능력 모두를 인정받았음을 의미하니까요. 사실 서거정의 능력도 능력이지만, 집안도 대단했어요. 서거정의 아내는 조선 초대 대제학을 지낸 권근의 딸이었고, 그의 집안도 증조할아버지부터 계속 관리로 활동해온 명문가였어요. 그러나 아무리 집안 배경이 좋아도 능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오히려 득이 아니라 실이 되기도 하죠. 그런 점에서 서거정은 능력과 집안 배경 모두를 갖추었기에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목숨을 건 선택의 기로가 찾아왔어요. 훗날 세조가 되는 수양대군이 황보인과 김종서 등 수십 명을 죽이고 정권을 잡는 계유정난이 일어났거든요. 서거정은 수양대군이 명나라 사신으로 갈 때 종사관으로 따라가면서 인연을 맺은 사이였고, 사육신의 박팽년하고는 오래도록 시를 주고 받으며 우정을 나눈 가까운 사이였죠. 깊은 고심 끝에 서거정은 수양대군을 선택합니다. 아무래도 계유정난을 일으킨 주역이던 한명회와 동문수학한 사이였고, 권람은 권근의 손자로 자신과 혈연으로 맺어져 있었죠. 그러나 이후의 행보에서 적극적으로 수양대군을 지지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아요. 왜냐하면 세조 밑에서 일할 수 없다고 평생을 방랑하며 살아간 김시습이 서거정을 비난하지 않고 친분을 유지했으니까요.





세조는 국왕에 즉위한 후 서거정을 공조·예조·이조 참의, 형조·예조 참판, 형조판서, 예문관 대제학 등 주요 관직에 잇따라 발탁해요. 이것은 서거정의 능력이 국가를 경영하는 데 꼭 필요했기 때문이에요. 47살에는 형조판서로서 예문관대제학과 성균관지사를 겸하며 문형을 관장하다 보니, 국가에서 편찬하는 책과 문서 중에 서거정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었어요. 50세에는 《경국대전》을 편찬하는 데 참여하고, 57세에는 《삼국사절요》를 편찬합니다. 59세에는 홍문관 대제학을 겸하면서 130여 권에 방대한 양을 자랑하는 《동문선》을 펴냅니다. 64살이 되던 해에는 의정부 좌찬성에 올라 《동국통감》을 편찬하죠. 이 외에도 너무 많은 책을 편찬해서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랍니다.


오늘날 조선 전기를 이끈 훈구파가 어떠한 사상을 가지고 정국을 이끌고자 했는지를 알려주는 인물이 서거정이에요. 23년간 문형으로서 과거 시험문제를 출제했던 서거정을 통해 조선 전기의 시대상을 추론할 수 있거든요. 예를 들어 서거정이 참여하여 편찬한 《삼국사절요》에서는 기존에 신라 중심의 역사서술이 아니라 고구려·백제·신라가 서로 대등하게 경쟁했다는 인식을 보여주고 있어요. 《동국여지승람》에서는 단군이 나라를 처음 세우고, 기자가 영토를 받은 이래로 삼국과 고려시대에 넓은 영토를 차지했다고 주장하며 우리의 자주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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