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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서평 17화

046 오만과 편견(제인 오스틴 저)

by 나무파파


‘돈 많고 잘생긴 나에게 반하지 않다니, 이런 여자는 당신이 처음이야.’

흔해 빠진 로맨스 소설이나 철 지난 아침 드라마에서나 나올법한 설정이지만, 이는 18세기말 영국의 여성 작가 제인 오스틴에 의해 탄생한 <오만과 편견>의 남자 주인공 다아시에 마음이다. 지금은 진부하게 느껴지는 이 설정도 당시에는 참으로 신박한 스토리였을 것이다. 그리고 18~19세기 영국 상류층 사회 모습을 생생하게 전달하기에 이 소설은 영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소설 중 하나로 추앙받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키이라 나이틀리 주연으로 2006년 극장가에 개봉하여 88만 명의 관람객 수를 기록하며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오만과 편견>은 당대 상류층 젊은이들의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는 로맨스 소설로 줄거리는 간단하다. 다아시는 사회적 지위가 상당히 높고 매우 부유하며, 거기에 잘생기기까지 한 완벽남이다. 그는 그의 배경 덕분에 무척 오만한 태도를 가지고 있다. 여주인공인 엘리자베스 역시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상류층 집안의 자제이나, 다아시와 달리 집안의 지위는 그리 높지 않다. 그런데도 엘리자베스는 어디서든 할 말은 하는 당당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이 둘의 사랑은 처음에는 그리 순탄치 않았다. 지역 무도회에서 처음 마주했지만, 엘리자베스는 다아시의 거만한 태도 때문에 그를 무례한 안하무인격 인간으로 치부하며 혐오한다. 반면 다아시는 엘리자베스와의 만남이 반복될수록 그녀의 매력에 눈을 뜨며 사랑에 빠진다.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는 두 남녀의 시선은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마주하기 시작한다. 다아시의 다소 오만한 태도는 자신의 엄청난 부와 높은 지위만 보고 들러붙는 파리떼 같은 사람들로부터 얻은 피로감이 한몫한 것이다. 어린 동생을 대하는 따뜻한 오빠의 모습과 배넷 가의 고난을 뒤에서 물심양면 도와주는 그의 모습은 겉모습과 다르게 따뜻함과 배려를 지닌 고귀한 성품이었다. 그렇게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판단이 편견에 따른 것임을 느끼며 다아시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 둘은 결혼에 성공하며 소설은 막을 내린다.

미국 도금시대를 배경으로 한 <위대한 개츠비(스콧 피츠제럴드 저)>의 도입부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어떤 사람을 평가할 때 모두가 너와 같은 유리한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을 명심해라"

<오만과 편견>은 다아시와 위컴(작중 다아시를 시기 질투하는 잘생긴 장교) 등 누군가에 대한 성급한 평판을 통해, 우리가 타인에게 쉽사리 내리는 평가가 얼마나 편견에 빠져 있는지 일침을 가한다. 작중 상류층의 사교계는 배은망덕하고 낭비벽에 빠진 인물인 위컴을 뛰어난 청년으로, 사려 깊은 다아시를 오만방자한 인물로 잘못 평가하며 가십거리로 삼는다. 이들의 모습은 마치 타인에 대한 험담을 자주 일삼던 나의 모습과 오버랩되며 무척 부끄러웠다. 다른 사람을 잘 알아보지 않고, 순간의 경험만으로 단정 짓는 나의 판단이 얼마나 경솔하고 오만했는지.. 소설의 제목인 '오만'은 다아시를 '편견'은 엘리자베스를 가리킨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와 나의 반성적 경험들을 반추하다 보니 '오만'은 성급한 편견에 빠진 우리를 힐난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우리는 사람을 판단할 때 성급할 뿐만 아니라 단편적인 요소로 단정 짓는 오류도 심심치 않게 범하곤 한다. 다아시가 무도회장에서 보인 표정과 태도만으로 오만하다고 단정 지었던 엘리자베스의 모습처럼 말이다. 다아시의 초반 거만한 모습은 그의 배경에서 기인한 피로감이 불러온 단편적인 모습이며, 그의 태도가 소설의 후반으로 갈수록 예의를 갖추어 가는 것은 그의 본질적 성정뿐만 아니라 엘리자베스와의 친분과 애정이 깊어감에도 있는 것이다. 같은 색이어도 검은색 주변에서는 밝게 보이고, 흰색 주변에서는 어둡게 보일 수 있다. 이렇듯 개인의 성격은 그가 처한 환경과 상황, 그리고 상대의 태도와 관계의 정도에 따라 가변적이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닌가? 평소 다정한 성격이었던 사람도 편의점 알바를 하다 진상 손님에게 받은 심리적 타격으로 다른 손님에게 까칠한 방어 기제를 드러내는 경우처럼 말이다.

이러한 인간에 대한 통찰과 더불에 이 소설은 로맨스 소설의 교과서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부자이며 잘생긴 남자 주인공. 항상 자기에게 다가오고 잘 보이려 노력하는 여자들에게 염증에 빠진 남자가, 자신을 거들떠도 안 보고 오히려 당당하게 행동하는 여자에게 반한다. 나한테 이런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라는 오글거리는 대사가 생각난다. 거기다 남자의 이모는 여자에게 너같이 천한 집안과는 이어질 수 없다 한다. 네까짓 게 감히 내 아들을 넘봐?라는 또 다른 오글거리는 드라마 대사가 떠오른다.

클리셰 덩어리인 소설이라 생각이 들겠지만 이 소설이 쓰인 시기는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도 전인 1700년대 말이다. 즉 현대의 많은 로맨스 물에 지대한 영향을 준 작품이란 뜻이다. 물론 현대 로맨스의 수많은 클리셰가 오롯이 제인 오스틴에 의해 탄생한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플롯이 '진부함'의 탈을 쓰기까지 그녀의 영향은 지대했을 것이다. 어떤 장르이건 후대에게 하나의 방향성을 잡아주는 선구적인 면모는 추앙받는 것이 당연하다.

이외에도 제인 오스틴은 당시 영국 사교계의 생생한 현실을 보여준다. 그들은 허세와 허영, 무가치한 인맥과 불필요한 유흥에 젖어 있었고, 부와 지위를 사람을 판단하는 금과옥조로 여겼다. 그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 사교활동을 하고 부와 명예를 과시하며, 파티를 즐기는 것이 전부이다. 아직 산업 혁명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기 전이라 대부분의 생산물에 대한 노동력의 기여가 지대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작중인물과 같은 유한계급이 보여주는 고뇌들은 사치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소수의 상류층은 물려받은 재산과 지위로 풍족한 삶을 살고, 대다수의 평민과 하층민은 몸이 부서져라 노동을 해야 입에 풀칠이나 가능한 사회의 모습은 역사의 어느 단면을 떼어 봐도 대동소이하다. 굳이 로맨스 소설을 읽고도 이러한 생각이 든다니 인간사 초지일관의 불평등함에 다소 실소가 일어난다.

각설하고, 어느 고전 이건 읽고 나면 참 많은 생각이 든다. 이는 수백 년간의 인간에 대한 고뇌와 사유를 향유하기 때문이다. <오만과 편견> 역시 그러하다. 이와 더불어 로맨스 소설의 선구적인 역할과 당대 사회의 생생한 묘사까지. 이러한 다양한 요소들이 멋지게 버무려졌기에 제인 오스틴의 소설이 아직까지 사랑받고 위대한 고전으로 평가받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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