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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서평 19화

048 금융의 역사(윌리엄N. 괴츠만 저)

by 나무파파

사농공상. 동아시아의 직업적 분류 개념인 이것은 직업에 대한 귀천의식을 여실히 드러낸다. 국가를 이끄는 관료를 제외하면 막대한 노동력이 들어가는 농업을 최우선으로 여긴다. 그뿐만 아니라 자본가를 배척하고 생산계급의 노동력을 신성시한 마르크스적 사고까지, 우리 사피엔스 종은 노동의 가치를 신성시한다. 이러한 뿌리 깊은 사상 때문일까 금융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부정적이다. 이는 단순히 노동을 높게 평가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리먼브라더스, IMF, 새마을 금고 사태, 부동산 PF 사태 등 나라를 넘어 세계 경제를 휘청이게 만든 크고 작은 일련의 사건에 금융 시스템 붕괴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들로 우리에게 금융이란 단어는 탐욕과 착취로 연결된다.

굵직한 금융 위기 이후에는 엄청난 부의 이동이 수반되었다. 누군가의 손해가 누군가에게는 엄청난 이득이다. 손해 본 자들의 머릿수와 비례하여 이익을 본 자의 주머니는 두둑해진다. 리먼브라더스 사태는 전 세계 수많은 이들에게 엄청난 손실을 초래했지만, 정작 위기의 시발점인 월가의 종사자들은 돈을 잃기는커녕 공적자금의 투입으로 엄청난 부를 거머쥐었다. 이런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이런 일들을 떠올리면 금융이란 고도의 문명화된 수탈 시스템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그렇다. 금융은 고도로 발달된 문명사회에서 등장하는 기술이다. 저자 괴츠만은 금융의 탄생을 위한 전제조건으로 다음의 세 가지로 설명한다.


(1) 계약 체결을 위한 의사소통 수단과 기록할 수 있는 문자 체계

(2) 계약 내용을 표시할 수 있는 수학적 기술

(3) 계약의 이행을 담보하는 법제화된 시스템


사실 이렇게 고도화된 사회 시스템이 수반되어야 하는 금융기술은 수탈을 위해 등장한 기술이 아니다. 우리의 뿌리 깊은 인식과는 다르게 금융의 본질은 본디 합리적이다. 한 사람이든, 기관이든, 국가든, 제국이든 흥망성쇠의 흐름 겪기 마련이다. 즉 잘나가는 시기가 있으면 힘든 시기가 찾아오는 법이다. 금융은 자원의 시간, 공간적 배분을 용이하게 해주는 기술로, 시기별 재정적 균질화를 위해 탄생하였다.


농업이 주된 산업이던 고대에는 차입-대출이란 금융 기술 덕분에 농한기 부족한 소비여력을 보강하고 수확기에 이를 갚으며 어려운 시기를 이겨낼 수 있었다. 현대에도 마찬가지다. 젊은 시절의 저축은 미래 노년기에 안온한 삶을 영위하기 위함이다. 생애 주기별 소득의 차이는 한 사람의 인생에 불안정성을 가중하지만 저축, 보험, 투자와 같은 금융 상품을 통해 개인의 인생에 불균등한 자산을 시간적으로 분산하여 안정성을 높여준다. 기관이나 국가에서는 채권이 이러한 역할을 한다. 무분별하게 발급되는 지금의 국채 시장은 과도한 국가 부채로 인한 위기를 우려하게 하지만, 사실 국채나 기관이 발행하는 채권은 미래의 부를 당겨 어려운 시기에 그 위기를 벗어나는 대표적인 금융 기술이다. 이러한 시간적 배분뿐만 아니라, 주식회사, 투자 등 금융상품은 동시대의 자원을 필요한 곳으로 모아 주는 공간적 배분의 역할을 한다.


이렇게 애당초 금융은 합리적인 자원의 분배를 위한 수단으로 고안된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비합리성 때문에 우리는 금융의 본질적 기능을 잊고 탐욕으로 점철되어 과도한 부채와 레버리지를 통한 부의 확장에만 몰두하게 만들었다. 이는 채무와 채권 양측 모두 마찬가지이다. 채무자는 더 많은 부를 위해 과도한 부채를 조달하고, 채권자는 더 높은 수익을 위해 이자를 높인다. 이렇게 과도한 탐욕은 부의 합리적 분배라는 이성적 기능을 매몰시켜버렸다. 금융제도가 불러오는 각종 위기의 원죄는 이를 남용하는 인간의 비합리성과 탐욕에 있다.


맹목적으로 부를 탐닉하는 인간의 욕심은 비합리적이지만, 모순적이게도 이러한 탐욕은 인류사 발전의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의 방증이 바로 18~19세기 동서양 발전 정도의 차이이다. 중세 시대만 하더라도 송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수준 높은 과학 기술과 막대한 부를 지니고 있었다. 당시 유럽은 수많은 군소 국가로 이루어져 있었고, 국력은 아시아에 비하면 한참 부족했다. 그런데 18세기 산업혁명을 기점으로 두 대륙의 차이는 뒤집어졌다. 신기술의 파도에 몸을 맡긴 진취적인 서구와 구체제에 얽매여 쇄국을 고수하는 동양의 이미지는 이때를 기점으로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요인이 이러한 차이를 낳았을까? 이에 대해서는 많은 의견이 있다. (1) 뉴턴, 애덤 스미스, 다윈 등 당시 유럽에 천재들이 많이 태어난 우연의 결과라 보는 시각, (2) 중국의 많은 인구수 때문에 유럽보다 중국에 천재가 태어날 확률이 더 높기 때문에 1번의 주장을 반박하며, 오히려 과거 현인들의 문장이나 문학을 외우게 하는 동양의 틀에 박힌 교육과 이에 비해 자유로운 교육을 중시한 서구의 교육 문화의 차이를 말하는 시각도 있으며, (3) 중국은 많은 인구수 때문에 노동력이 풍족하여 기술 발전의 유인이 적었던 반면, 유럽은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 기계의 발전이 필요했다는 주장이나, (4) 중국은 주요 자원이 대규모 인구 거주 지역에서 멀리 있었기에 이러한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어려웠다는 지리적 요인을 이유로 보기도 하며, (5) 중국은 이미 농업에서 큰 성공을 거둔 후 송나라의 융성을 겪었지만, 반대로 유럽은 매우 낮은 수준에서 시작하였기에 기술의 급격한 성공이 필요하여 이러한 차이가 발생했다는 주장 등 수많은 시각과 주장이 있다.


의견이 분분한 이유는 현재가 하나의 원인에서 귀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많은 요인과 우연이 결합하며 지금의 결과를 낳았다. 이 중에서 저자는 금융 측면에 집중하여 두 대륙의 차이를 살펴본다. 앞서 말했듯 금융은 부족한 현재를 미래의 부를 통해 헤쳐나가는 기술이다. 즉 금융이란 씨앗은 척박한 땅에서 발아한다. 중국의 토양은 유럽의 그것에 비해 너무 비옥했고, 그래서 금융의 혁신이 발아하지 못한 것이다.


11~12세기 경 송나라는 어느 국가보다 화폐 시스템이 발전되어 있었다. 화폐란 몸으로 치면 피와 같다. 화폐가 없으면 금융이란 시스템이 돌아가기 어렵다. 송나라는 발달한 화폐경제 시스템에도 불구하고 유럽에 비해 시간에 따라 가치를 재분배할 필요성이 적었기 때문에 금융의 혁신을 갈망하지 않았다.


중앙집권화되고 황권이 강하며 농업적 성공으로 먹거리도 부족하지 않은 중국에 비해, 수많은 왕국으로 갈라져 수없이 전쟁을 했고 군비에 많은 자원이 소모되어 일반 시민이 먹을거리는 충분치 않았던 유럽은, 군비 확보와 시민들의 안정적인 노후를 대비하기 위해 채권과 연기금이 발달했다.


사회가 부유했기에 중국은 미래의 자산을 현재로 차용할 유인이 적었고, 반면에 유럽은 잦은 전쟁과 부족한 자원 탓에 미래의 가치를 현재로 이전하여 당시의 상황을 타개할 필요성이 높았다. 이러한 이유로 12세기 베네치아에서 최초의 국채가 등장했고, 대항해 시대와 함께 암스테르담에서 주식회사가 등장했으며, 중세 유럽에 각종 연금과 보험 상품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채권은 만기 시점에 따라 0.1%의 이자 차이가 엄청난 수익률의 차이를 초래하고, 보험과 연금은 사람들의 기대 수명이 운용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그렇기에 어느 때보다 확률과 통계, 계산 등 수학적 기술이 중요하였고, 금융 기술의 발전은 수학의 발전과 함께하였다. 수학이란 물리학의 언어이다. 수학의 발전은 뉴턴과 같은 물리학자를 탄생시켰고, 자연과학의 발전은 기술혁신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이러한 발전 동력이 파이를 조금이라도 더 먹기 위한 이기심 때문인지, 효율적인 시공간적 자원 배분을 추구하는 공명심 때문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결국 금융의 기술은 양날의 칼처럼 미래에 대한 안정성과 불확실성을 모두 선사한다는 것이다. 충분한 저축과 건실한 투자는 더욱 안정적인 미래를 선사할 것이다. 반대로 더 빨리, 더 많이 갖겠다는 탐욕은 과도한 레버리지와 파생상품 같은 고위험 투자를 종용하여 빽도 아니면 모의 결과를 선사할 것이다. 윷놀이에서 빽도와 모가 나올 확률은 같지만, 투자의 경우 어느 결과가 더 확률적으로 높은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확률과 통계라는 금융의 기본적인 수학적 이론은 도박 이론과도 그 궤를 같이 한다. 그렇기에 주식을 도박과 비교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하루에도 엄청난 급등락을 반복하는 자산 시장의 차트를 보면 이러한 주장에도 일견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금융의 탄생을 복기해 보면 탐욕에 젖은 한쪽 칼의 이면에는 안온함을 위한 열망이 담겨 있다. 이성과 탐욕이 어지럽게 뒤섞인 현대의 금융판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금융의 칼날이 자신의 목을 겨눌지, 안정적인 미래의 방해물을 제거할지는 검을 쥐고 있는 개인의 의지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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